미식과 자본주의

요즘 이 블로그에는 소홀한 편이다. 사실 최근의 관심사는 음악이나 영화가 아니라 바로 '미식'이다. 맛있는 요리를 탐하는 그 '미식'이 맞다. 이 블로그와는 전혀 다른 '미식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어서, 더 그 쪽에 관심이 커졌을 수도 있겠다. '미식'에 관한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내 직업도 '지식 노동'이 많은 부분을 포함하는 직업이기 때문일까? 음식의 맛에 눈을 뜨면서, '지식 노동'을 포함해서 '타인의 보이지 않는 노동'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음식점에서 '원가 타령'을 하는 건, 누리고 있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미식'은 확실히 '자본주의의 꽃'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북(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맛의 사치를 누릴 수 있었을까? 나 역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기에, 가격 대비 성능(맛)을 따진다. 하지만 '미식'에 조금 눈을 뜨면서 무턱대고 '저렴함'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비싼 음식에도 분명 그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 그런 태도를 갖고 나서, 요리를 즐길 줄 아는 심리적 여유가 생겼다.

'미식'이란 단순히 '음식의 맛'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처럼 맛 뿐만 아니라, 음식점의 분위기부터 서비스까지 여러 가치들이 '미식'에 포함될 수 있다. 유명한, 그리고 그만큼 가격 수준이 있는 레스토랑들은 확실히 인테리어(실내 장식)에도 꽤 신경을 쓴다. 또, 식기의 선택에서도 특별 제작하거나 유명 작가의 작품을 사용할 정도로 세세하게 신경쓰는 셰프들도 있다. 좋은 식기를 사용할 수록 요리의 꾸밈(데코)에도 공을 들이기에, 그런 셰프의 요리들은 '멋'스럽다. 미식은 비단 '맛' 뿐만 아니라, '멋'도 함께 즐기고 평가하는 행위가 아닐까?

'인테리어'부터 '식기의 선택' 그리고 '조리에 들어가는 정성'까지, '요리'라는 행위에는 '식자재 원가' 외에도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들'이 더해진다. 같은 식재료로 만든 요리들도 들어간 정성에 따라 셰프 각자가 가치를 부여하고, 소비자가 선택하는 일은 다분히 '자본주의'적이다. 음식이 원가보다 터무니 없이 비싸고 맛이 없다? 그럼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그 음식점을 선택하지 않으면 된다. 정말 그 가치에 비해 터무니 없는 가격이라면, 결국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도태될 것이다. 비싸지만 인기가 좋은 음식점에는 분명 그 가격에 걸맞는 가치인 '맛과 멋'이라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원가 타령에 물든 사람들에게는 그 가치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유명인이 차린 음식점이 비싸다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맛이 없고, 터무니 없는 가격이라면 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우리가 정말 비난해야할 점은 공중파를 비롯한 '대중매체'가 음식점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노이즈마케팅에 이용되는 상황이다. '맛'은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이다. '맛의 잣대'에까지 대중매체가 낭비될 필요는 없다. 그런 낭비는 '자본주의의 순수함'을 천박하게 오염시킬 뿐이다.
2015/01/23 16:14 2015/01/23 16:14

stargazer

우리 우주의 탄생이 한낱 '신적 존재'의 불꽃놀이에 불과하고,

우리 우주의 역사가 순간 피어났다 사라지는 불꽃의 수명에 불과하다면.

우리 존재가 그 불꽃 속 에너지와 미립자가 작용하는 찰나에 불과하고,

우리의 꿈은 그 원리와 법칙에 불과하다면.

...

우주의 나이는 대략 140억년.

하지만 그 시간의 개념이 지금 우리의 시간과 같을까?

시간이 흐름이 인력의 영향을 받는다면,

우주의 밀도가 훨씬 더 높았던 시기의 '시간의 흐름'은 지금보다 더 느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주가 더욱 팽창하여 밀도가 더욱 낮아지고 인력도 더 약해진다면,

시간의 흐름은 지금보다 매우 빨라져서,

지금 우리에게 수십 년, 수백 년인 시간도 결국에는 찰나로 수렴하지 않을까?
2015/01/08 11:12 2015/01/08 11:12

뉴로맨서(Neuromance) - 윌리엄 깁슨

'뉴로맨서(Neuromance)'라는 단어에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SF와 판타지 장르에 익숙하고 생물이나 의학적 지식이 있다면 '신경/신경계'를 의미하는 'neuro'와 '시체나 영혼을 조종하는 주술사'를 의미하는 '네크로맨서(Necromancer)'를 조합한 단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은 사이버펑크(Cyberpunk)라는 장르를 개척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한다. '뉴로맨서'는 '사이버스페이스(Cyber Space)'나 '매트릭스(Matrix)' 같은 개념들이 등장하는데, 이 책이 발표된 때는 고작 1984년이었다. 제목부터 뉴로맨서와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는 '매트릭스(the Matrix)'나 인간의 인지 속 세상을 다룬 '인셉션(Inception)' 같은 영화들부터 소설과 코믹스들까지 이 작품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시대를 앞선 SF 작품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도 흥미롭다. 전통적인 '고전 SF'에서는 소설의 결말이 비극적이더라도,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는 꽤 낙관적인 견해가 대세였다. 그 낙관적인 견해 속에서 인류는 꾸준히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뤄내고 지구라는 굴레를 벗어나 우주 개척 시대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사이버펑크'는 낙관적인 '유토피아적' 미래가 아닌, 불안과 허무로 가득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려낸다. '사이버펑크' 장르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하고, 과학기술은 현재보다 꽤 발전하지만 장미빛 미래는 아니다. 국가과 법을 대신할 '초거대 기업'과 '군산복합체'가 등장하고, 인류는 '안드로이드(인조인간)'이나 '개조인간'과 공존한다. 지구와 태양계 밖에 있는 인류가 이주 가능한 '골디락스 존'의 발견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일까? '우주 개척'에 대해서도 뚜렷하지 않다. 20세기에 들어서 더욱 두각을 나타낸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의 영향으로도 보인다. '사이버펑크'를 생각하면, '인공적인 빛과 그림자가 둘러싼 거대한 도시'나 '향락의 네온 사인 불빛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한 안개와 매연이 가득한 골목' 등이 떠오르는 이유도 그런 디스토피아적 관점에 있겠다.  

소설 뉴로맨서는 그런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현실이 아닌 사이버스페스를 배경으로 하는 '전쟁'에서, 소모품인 '병사'는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는 평범한 '인간들과 인공지능들'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고전적인 메타포를 따라 세상을 구하는 '신화적/영웅적 모험담'과는 거리가 있고, '정의'나 '진실' 같은 불변의 가치도 보이지 않는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퇴폐와 염세로 가득하고 결말은 허무에 가깝다. 하지만 기존의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니고, 평범한 인생의 종착역에 더 가까운 이야기이기에 'SF 장르의 하나'로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을까? 지금은 꽤 익숙한 소재들을, 오직 글로써 시각적으로 그려낸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은 그 시대를 고려하면, 경이롭다. '모험담'보다는 큰 이야기의 줄기 속에서 '한 에피소드'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섬세하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내어서 끝까지 꽤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시대를 앞선 상상력' 만큼이나 '시대를 앞선 화법'이라고 할 만 하겠다. 두 번째 소설까지만 발간된 '스프롤 삼부작'이 마지막까지 온전히 번역되어 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2015/01/02 12:06 2015/01/02 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