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피츠제럴드와 무라카미 하루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누군가는 헛소리를 하지만,

가까운 일본 출신으로 유럽쪽에서 인정받는 작가들을 보면,
유년기나 청년기의 긴 시간을 유럽에서 보냈더라.

아마도 유럽에서 보낸 긴 시간이 유럽에서 통할 만한,
즉 '전형적인 일본 냄새'가 나지 않는 작품이 나오게한 원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생각은
그저 어떤 국수주의 자의 '뇌내 망상'일 뿐일지도.
그런 망상으로는 대한민국에서 '노벨 문학상'은 영영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

'무라카리 하루키'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스콧 피츠제럴드'이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개츠비'로 익숙한 '스콧 피츠제럴드'의 이름은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도 자주 언급될 정도이고,
하루키의 작품 세계에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영향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어떤 색 꿈을 꾸는가?
한 언어로 또 다른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평생을 홀로였던 어떤 사람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칠 수 있을까?
2014/08/13 13:51 2014/08/13 13:51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부끄럽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실의 시대'를 이제야 읽었다. 사실 2010년에 새책으로 구입했고  2011년부터 읽기에 도전했는데, 초중반을 넘어가면 읽기가 어려워져 두 번이나 중단을 했었다. 왜 그랬을까? 문학 서적을 읽을 때는 그런일이 없었기에 아이러니할 뿐이다.

수필집인 '무라카미 라디오'와 단편소설집인 'TV피플'을 제외하면 내가 읽은 하루키의 장편소설은 순서대로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1Q84' 정도로, 그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초라한 수준이다. 세 작품은 떨어져있지만 관련있는 '두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실의 시대는 이 세 작품과는 다르게, 다분히 '연애소설'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는 어느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고 노화를 시작하지만 정신은 육체와 다르게 죽는 순간까지도 성장이 가능한 점처럼, 연애소설이면서도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연애, 사랑 역시도 삶의 한 과정이고 성장의 한 과정이기에 연애소설과 성장소설의 공통분모는 꽤 많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의 삶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요소가 아니던가?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슬픔과 낭만, 결핍과 공허가 공존하는 소설'이라고 하고 싶다.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19세에서 20세로 넘어가는 시간을 위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절은 사랑의 슬픔과 낭만이 공존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성장의 과정'에서 뭔가 '결핍'된 사람들이다. 결국 죽음으로 영원히 함께한 비운의 연인 '기즈키'와 '나오코'에게는 성인에게 필요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용기' 혹은 '자아 성장'이 부족했다. 선배 '나가사와'는 세상을 사랑하는 '포용' 혹은 '너그러움'이 결핍되었고, 그를 사랑했지만 결국 죽음을 선택한 '하쓰미' 역시 '현실감각' 혹은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정상에 가까웠던 '레이코' 역시 비슷한 이유들로 정신병을 앓았다. 그나마 와타나베를 구원할 수 있는 '미도리' 역시도 성장 과정에서 '애정'이 결핍되어 애정에 큰 갈증을 느끼는 여자였다. 상당히 견고하고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 역시도 그 고지식함은 아주 '미세한 균열' 같은 결핍에서 기인했으리라 생각된다.

하루키의 비교적 초기 작품이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이 잘 녹아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다분히 현실 세상인 '도쿄'와 나오코와 레이코가 머물었던 '환상 속 세상' 같은 '아미료'로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하루키의 인기 소설들의 공통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주인공 와타나베의 모습은 하루키의 소설들 속 견고하고 건실한 주인공의 전형이고, 무뚝뚝한 미도리 아버지의 모습 역시 하루키 작품들 속의 전형적인 아버지 모습과 닮아있다. '미도리'로 대변되는 '구원자' 역시도 공통적인 요소이다. 미도리에게 전화하면서 끝나는 장면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음악이 빠질 수 없는데,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비틀즈(the Beatles)'의 곡 'Norwegian Wood'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목의 유래처럼 작가 하루키의 '문화적 취향' 역시도 잘 녹아있어서, 음악과 문학에 관한 그의 사랑이 엿볼 수있다. 그가 사랑하는 음악은 클래식과 째즈 그리고 올드팝 정도로, 그가 존경하는 '스콧 피츠레럴드'로 대변되는 그의 '문학적 취향'처럼 '음악적 취향'도 상당히 미국적이라는 점이 재밌다. 원제 '노르웨이의 숲'은 다분히 '아미료'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이 유럽에서 쓰여졌다기에 그 영향일까도 생각했지만, '노르웨이'가 있는 '북유럽'이 아닌 지중해 연안의 남유럽 국가인 '그리스'와 '이탈리아'란다. 하루키는 그 온화한 날씨 속에서도 '노르웨이의 차가운 숲'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이 소설이 겨우내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작품은 70년대 말 대학생들의 사회 저항 운동인 '동맹 휴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질풍노도처럼 어지러웠던 주인공 와타나베의 '내면 세계'만큼이나 세상도 어지러웠고, 그렇기에 '세상을 보는 가치관'과 직결된 그 결핍들이 더 크게 부각되었을 수도 있겠다. 마침 이미 알고 있는 일본 노래이자, 이 실패한 저항 운동이었던 '동맹 휴학'을 배경으로 하는 노래인 '모리타 도지'의 '우리들의 실패'가 떠올랐다.

역시 매우 재미있고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그만큼 슬프고도 아픈 소설이다. 죽음 역시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껴안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앞으로 내가 겪게될 죽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을 뻔했다. 젊음이란 아름답지만 그만큼 덧없고 슬프다. 의미 없이 허비된 내 지난 젊음 때문이었을까? 나에게는 너무나도 공허하면서도 아리게 다가왔다.

1987년에 발표된 소설이기에 국내에도 다양한 출판사에서 다양한 번역가에 의해 출간되었다. 내가 읽은 '상실의 시대'는 가장 널리 판매되었다고 할 수 있는 '문학사상'의 책으로, 1989년 초판이 출간된 후 2010년에 나온 3판이다. 최근에 나온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가의 '노르웨이의 숲'도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다.
2014/07/14 01:58 2014/07/14 01:58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지난 수요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있었던 위대한 세기 '피카소(The Great Century Picasso)'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샤갈'의 전시회 이 후 두번째네요. 사람이 상당히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걱정보다는 적었습니다. 9월 3일이 마지막이라 이미 볼 사람은 다 봐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생각보다 유치원생,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많더군요.

'샤갈'의 전시회 때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많은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카소의 약력을 보니, 전시된 작품이 '많은' 것은 아니더군요. 피카소가 얼마나 다작(多作)을 했는지 놀랐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간 두 예술가 샤갈과 피카소가 같이 찍은 사진도 있던데, 나이 든 두 사람의 모습이 많이 닮은 느낌이었습니다.)

1881년에 태어나 1973년에 생을 마감한 피카소,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많은 여러 여자를 만났고, 그 넘치는 열정으로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대중의 인기를 받아가며, 장수하여 열정적으로 많은 작품을 남긴 예술가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피카소의 인생이 정말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만큼 '장수'와 '대중의 인기'를 동시에 누린 '축복받은' 예술가는 흔하지 않겠지요. '천재'라고 불렸던 예술가들을 보면 살아서는 유복하지 않거나 죽은 후에야 인정 받은 사람이 많으니까요.

'피카소'를 '천재'라고 부르지만 그를 천재로 만든 건 비단, 그의 '재능'뿐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꾸준한 다작으로 그의 독특한 스타일(화풍)을 널리 인식시킨 '정열'이 그를 천재로 인식시킨 중요한 요소는 아닐지...

살아있는 예술인 중에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나네요. 20대부터 꾸준히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1년에도 여러권을 책을 집필할 정도로 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보이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책을 쓰는 것도 결국 '체력'이 중요하다며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마라톤으로 체력 관리를 한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을 몇 권 읽어보았지만 '천재'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의 꾸준함과 열정으로 언젠가 그렇게 불릴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요.

또 '피카소'를 보면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뮤지션' 혹은 '진정한 밴드'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게 하네요. '오래 살아서(오랫동안 해체하지 않고) 왕성히 좋은 음악을 오래 들려주는 뮤지션(혹은 밴드)'이 바로 제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이고 '아티스트'라고 불릴 만한 자격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짧은 기간 활동하여 기념비적인 음악을 남겨도 자격이 되겠지요.)

'나는 어린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의해서만 살아있다.'
'나에게 미술관을 달라. 나는 그 속을 가득 채울 것이다.'

미술관에 크게 적혀있던 피카소의 말들입니다. 그의 정열이 잘 느껴지는 문장들이 아닌가합니다.
2006/08/12 14:27 2006/08/12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