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개봉한다기에 박차를 가해서 지난주에 독파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바로 전에 읽은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가 좋았기에 작가 '공지영'에게 흠뻑 빠져들어 있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좋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기작가답게 문장도 편해서 쉽게 책장이 넘어갔다.
여자주인공 '문유정'의 이야기, 멋진 노래나 시나 글의 한 구절, 남자주인공 '정윤수'의 짧은 이야기인 '블루노트'로 이어지는 구성이 참 좋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들려주고 사이사이에 삶과 죽음, 슬픔과 사랑에 관한 짧은 글들... 시간 상으로 나중에 발표된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의 향기를 찾을 수 있어서 반갑기도 했다. (반대도 마찬가지여서 '빗방울처럼..'에서 '우행시'에 대한 것들을 읽을 수 있다.)
사실 멜로영화로 만들어졌다기에 슬픈 거라는 예상을 하고 읽으니 초반부를 읽을 때부터 눈이 그렁그렁했다. 다른 독자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이 소설은 오히려 앞부분이 더 슬펐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한, 삐뚤어진 인간인 '유정'과 살인자이자 사형수인 '윤수',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고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니 별 슬플 것도 없을 듯한 이야기가 어쩐지 더 슬프게 느껴졌다.(아, 영화 예고편의 부작용!) 그들이 서서히 마음의 치유를 받는 과정을 지나면서 그렁그렁한 느낌은 점점 가벼워져 갔다. 결국 인간에게는 빠르건 느리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지워져있기는 하지만...
'문유정'이라는 캐릭터는 참 멋진 점이 있었다. 천주교(카톨릭) 신자인 작가가 그리스도교(천주교과 개신교)의 위선을 조롱하는 모습이 어쩐지 멋져 보였다고 할까? (소설을 읽으면 처음에는 좀 거북해질 '광신도'가 있을지모 모르겠다.) 부유한 천주교 집안의 '유정'과는 전혀 다르게 자라왔고 모니카 수녀와 유정을 만나가면서 점차 '신'이 신도하는 길로 빠져드는 '윤수'의 모습은, '상습 자살시도자'와 '살인자'의 대비와 함께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윤수'처럼 예수도 사형수 였다는 점이나 형이 집행되기 전 '유정'이 '윤수'를 부인한 점 등 성서를 염두한 작가의 배려가 눈에 띄고, 유정이 처음에 윤수를 그토록 싫어했던 이유가 예상대로 였을 때와 이어서 '윤수'와 '은수'의 중간 발음이 '운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 부터 영화화를 고려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진짜 이야기'가 오가면서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다듬어가는, 인간의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시간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많은 찬반 논란에도 '사형제도'에 대해 중립이거나 찬성쪽에 가까웠던 나의 마음이 반대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사형'은 결국 '복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 '복수'가 과연 정말 '사회의 원한'을 산 사람에게 이루어졌는가는, 윤수의 경우처럼, 확실하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살인자와 피해자 외에는 아무리 형사들이 수사를 해도, 아무리 기자들이 기사를 써도 사실을 만들 뿐 진실은 완전히 밝힐 수 없으니까. 그리고 사형수들이 법정에서 사형을 받기까지 '범죄와 수감'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데에는 우리 사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그즈음 나는 어떤 사람도 행복의 나라나 불행의 나라 국경선 안쪽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두들 얼마간 행복하고 모두들 얼마간 불행했다. 아니, 이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면 얼마간 불행한 사람과 전적으로 불행한 사람 이렇게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종족들은 객관적으로는 도저히 구별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뮈 식으로 말하자면 행복한 사람들이란 없고 다만, 행복에 관하여 마음이 더, 혹은 덜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