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궁전'의 리더, '9'의 또 다른 도전 '9와 숫자들'.

밴드 '그림자궁전'이 2007년 1집을 발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한 활동정지에 들어간 동안,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멤버라고 할 수 있는, '9', 'stellar', 그리고 '용'은 각자 다른 밴드에 몸담고 있으며, 그 중 밴드 그림자궁전를 결성하고 정체성을 만든 리더 '9'는 또 다른 밴드의 리더로 곡을 쓰고, 음반 작업을 하고 간간히 공연을 해왔죠. 그 밴드의 이름은 '9와 숫자들'로 본인의 닉네임(9)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사실 9에게는 이번 앨범이 세 번째 1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1집만 세 번 냈다고 했던 뭐 가수처럼 말이죠.) 이제는 '장기하와 얼굴들'로 유명한 '붕가붕가 레코드'의 시작과 함께한 포크 4인조 '관악청년포크협의회(이하 청포협)'의 멤버 '9'로서 1집이자 마지막 앨범 '꽃무늬 일회용휴지/ 유통기한'에 참여하였고, 역시 '그림자궁전'의 1집이자 마지막 앨범이 될지도 모르는 앨범 '그림자궁전'으로 '두 번째 1집'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번 앨범 '9와 숫자들'로 '1집만 세 번째'라는 흔하지 않은 경력을 완성했습니다.

'청포협'이 멤버 개개인의 사정으로 앨범 발매 후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인디씬에 관심이 조금 있는 분들이라면, 그의 이름은 '그림자궁전'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알고 있을 법합니다. 하지만 9는 그림자궁전 활동 중에는 틈틈히 '포크가수 9'로서의 곡작업 및 '홍대앞 프리마켓'과 '클럽 빵' 등지에서 공연을 하면서, 그림자궁전과는 다른, 또 다른 음악세계로의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사실 게을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정진의 결과물이 '9'라는 이름들 단 솔로 앨범이 아닌, '9와 숫자들'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했습니다.

'9와 숫자들'에 대한 흥미는 이런 9의 음악 활동 경력에서 나옵니다. 밴드 그림자궁전에서 stellar를 프런트로 내세우고 '그림자'처럼 활약했던 점과는 다르게 직접 프런트로 나서고 있고, 닉네임을 밴드 이름의 맨앞에 넣음으로서 '포크가수 9'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곡 '그리움의 숲'은 그림자궁전이나 포크가수 9를 생각했을 때, 상당히 상큼한 출발을 보여주는 트랙입니다. 영미 인디씬의 포크팝을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맑은 로우파이(Lo-Fi) 사운드는 이 앨범이 지향하는 '복고'라는 지향점을 들려줍니다. 뛰어나지 않지만 곡 분위기에 적절한 보컬, 충분히 시적인 가사와 꼭 찬 밴드 사운드는 지난 시간들에 대한 향수로 가득합니다. '너'를 거룩한, 심오한 등으로로 신격화 숲의 초록과 빨간 모자, 빨간튜브 등 빨강이라는 선명한 색의 대비는 농밀한 그리움과 어우려져 청자의 감각을 사로잡습니다.

이어지는 '말해주세요'는 가벼운 팝-락풍의 연가입니다. 좀 더 단백한 9의 목소리로 불려지는 진솔하고 담백한 가사는, 사랑의 무게가 가벼운 이 시점에서, 90년대 이전에 느낄 수 있었던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다시 느낄 수 있게합니다. 가사에 진솔함에 비해, 경쾌하고 조금은 유치하게 들릴 수 있는 연주가 재밌습니다.

'오렌지 카운티'는 제목에서 재치가 느껴집니다. '오렌지족'으로 유명한 '한국의 오렌지 카운티'는 바로 압구정으로, '오렌지족'는 추억 속의 단어를 차용했다고 하겠습니다. 묵직한 타악기 소리는 댄스 플로어의 뜨거운 비트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그 무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구애에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은 그 시절 순박한(?) 청년의 모습을 엿보게 합니다.

이어지는 곡은 뮤직비디오도 만들어지면서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이라고 할 수 있는 '석별의 춤'입니다. '석별'과 '춤'이라는 대비되는 이미지로 인해 이 곡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애틋한 이별의 곡이 되어야하겠지만 춤이라는 부분에 충실하여, 이 앨범에서 가장 댄서블한 트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리지 부기'는 대학생활의 로망을 노래한 트랙으로, 다분히 선정적으로 오해를 살만한 가사들이 숨어있습니다. '슈거 오브 마이 라이프'는 어렵지 않은 가사로 확실한 의미를 전달하는 사랑 노래입니다. 비장한 느낌의 연주로 시작하는 '삼청동에서'는 시적인 가사가 인상적인 트랙입니다. 경쾌한 '옛날 얘기'로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심각해지는 '실낙원'도 그 비장함을 이어가네요.

이미 '그림자궁전' 활동과 병행했던 포크가수 '9'의 곡으로 알려진 '이것이 사랑이라면'은 '9의 숫자들'의 앨범을 통해 되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난 하지 않겠어요'으로 사랑의 환희와 아픔을 동시에 표현해낸 가사는 '9식 화법'의 정수가 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중한 가사와 달리, 조금 가볍고 경쾌한 연주의 대조도 인상적입니다.

'선유도의 아침'은 시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댄스의 느낌이 충만한 트랙입니다. 그 흥겨움에 푹 빠져서 후렴구 '그래 없었던 일로 해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를 따라 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몰라요. '연날리기'는 그 흥겨움을 이어가면서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게 합니다. 더불어 연날리기를 통해 세태를 비판하는 정신이 돋보이는 트랙이기도 합니다.

'디엔에이'는 '그림자궁전'의 소위 '과학 시리즈' 곡들를 연상시키는 제목입니다. 가사 내용은 참으로 과학적인 단어인 'DNA'와는 경원하게 들릴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와 나의 몸속 너무 깊은 곳'에 있는 그것을 DNA에 비유한 재치에 감탄하게 됩니다. '낮은 침대'는 앨범을 마지막 트랙으로 마지막의 느낌처럼 '난 도망가버릴 거에요'라는 외침이 인상적입니다.

포크, 팝, 락, 댄스가 녹아든 '9와 숫자들'의 동명의 데뷔 앨범은 '그림자궁전'과는 전혀 다른 스펙트럼의 보여주는 앨범입니다. 하지만 그 멀어보이는 두 간극 사이에 존재하는 '9의 음악적 DNA'에는 공통적으로 '복고'가 녹아있습니다. 요즘 음악보다는 80년대, 90년대 음악에 가까운 가사와 화법, 멜로디는 9의 감각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소리를 펼쳐냅니다. 특히 댄서블한 사운드는 9가 프로듀싱으로 참여했던 같은 레이블 소속인 '흐른'의 앨범에도 감지된 부분으로, '그림자궁전'의 무기한 활동정지 후(혹은 그 이전부터) 감지되었던 9의 새로운 음악적 지향점이 아닐 하네요. '그림자궁전'의 데뷔 앨범에 이어 향후 2000년대의 처음 10년 동안 인디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을 음반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 확실한 두 번째 앨범을 완성한 '9'에게 경의를 표하며 별점은 5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