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톤 프로젝트(Epitone Project)'의 첫 정규앨범 '유실물 보관소'.

작년 발표된 '긴 여행의 시작'은 컴필레이션 앨범 수록곡들을 모은 '스페셜 앨범'으로 파스텔뮤직에 합류 이후, 정규앨범이 발매되기 전까지 기다림에 목이 마를 팬들을 위한 일종의 팬서비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 늦지 않게 발매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정규앨범이 늦어지면서, '긴 여행의 시작'이 아닌, '긴 기다림의 시작'이 되어버렸죠.

앨범을 시작을 여는 트랙은 앨범 제목과 같은 '유실물 보관소'입니다. 신디사이저와 함께 시작되는 고요한 울림은 오케스트라와 일렉트릭기타가 어우러지면서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변합니다. 캐나다의 'Steve Barakatt'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진취적인 사운드와 함께 펼쳐지는 사랑의 순간 순간들. '유실물 보관소',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떠나는, 또다른 '긴 여행의 시작'이 될지도 모릅니다. 유실물 보관소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기억들, 그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살펴보죠.

"유난히 검은 밤, 그래서 유난히 별이 반짝반짝 빛나던 그 밤. 모든 이야기는 그 밤에 시작되었는지도 몰라요."

'반짝반짝 빛나는'은 이미 여러 앨범에서 피쳐링으로 반짝반짝 빛났던 '루싸이트 토끼'의 '조예진'이 참여한 트랙입니다.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시티팝의 향기는 조예진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루싸이트 토끼의 곡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멋진 분위기를 들려줍니다. 별이 반짝반짝 빛나던 밤, 가로등 아래서 멀어지던 그의 뒷모습에서 무엇을 잃었을까요?

"소중했던 기억들이 스쳐지날 때, 그 순간의 감정은 한숨 섞인 미안함 뿐인 걸... 너는 알고 있니?"

파스텔뮤직의 또 다른 유망주 '이진우'가 참여한 '한숨이 늘었어'는 전 앨범의 '그대는 어디에'가 떠오르는 트랙입니다. 푸르고 높은 하늘처럼 청명한 목소리가 빛나는 클라이막스는 '찬란한 슬픔의 한숨'을 표현합니다. '재밌다는 영화를 일부러 찾는' 그의 모습은 '그대는 어디에'에서 '즐겨보는 드라마가 하나 생긴' 그녀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대 생각이 날 때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그녀의 모습처럼, 사랑했던 기억이 떠오를 때 그는 미안한 마음과 함께 한숨을 짖구요.


"우리가 다시 함께 할 수 있는 봄이 찾아오길...그대가 없는 세상이라는 사막에서 나를 지키며 선인장처럼 묵묵히 서있을테니..."

익숙한 기타 코드과 함께 시작하는 '선인장'은 여성보컬 '심규선'의 목소리로 불려집니다. 편안한 멜로디 위를 흐르는, 마치 '선인장 재배 지침서(?)' 같이 시작해서 선인장의 시점으로 이동하여 스스로의 모습을 위로하는 가사가 인상적입니다.  슬픔 속에서도 관조하는 듯한, 정말 굿굿한 선인장같은 음색을 들려주는 심규선의 목소리도 인상적이구요. 연가가 되어야 할 법한 기타 연주는, 아주 약간의 습기를 간직했고 적당히 건조한 보컬과 함께 평정심을 유지한 이별 노래를 완성합니다.

기억과 기억들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틈새, 쉽게 지날 수 없는 '좁은 문'을 지나 또다른 유실물로 시선은 옮겨갑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 그 하늘 아래서 느껴지는 소중했던 순간들, 그리고 찬란한 슬픔..."

'이화동'은 지난 앨범의 '그대는 어디에'에 이어 다시 한번 '한희정'과 호흡을 맞춘 트랙입니다. 함께 걷던 골목길과 눈이 부신 햇살과 사소한 나뭇잎에서 조차도 느껴지는 함께 했던 시간들은 그야말로 '찬란한 슬픔의 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세정과 한희정의 듀엣은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져 그 슬픔의 찬란함을 더할 나위없이 잘 표현하고 있구요.

'해열제'는 파스텔뮤직의 또 다른 신예 'Sammi'가 목소리를 들려주는 트랙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목에서는 '재주소년'의 '아스피린'이 떠오르더군요.) 흥겨운 보사노바 리듬과 함께  사랑의 지나간 후에 찾아오는 열병, 그 열병을 위한 해열제는 '눈물을 쏘옥 빼는 일'일까요?

연주곡 '시간'은 서랍속 옛 일기장처럼 이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버린 시간들을 담고 있을 법합니다.

"기억해. 기나긴 이별의 겨울을 지나서 다시 찾아올 우리의 봄이 있다는 걸..."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함께 하는 '손편지'는 차세정이 부르는 트랙입니다. 비록 이별이라는 아픔의 겨울을 보내고 있지만, 앞으로 찾아올 따뜻한 봄을 기다리자는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진솔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함께 흐르는 목소리에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와 함께 써내려가는 손편지처럼, 간절한 진솔함이 담겨있습니다.

'서랍을 열다'는 연주곡이지만 앞선 트랙들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로 에피톤 프로젝트의 크로스오버적인 성향을 느낄 수 있는 트랙입니다. 간결하면서도 감성적인 멜로디와 어우러진 묵직한 비트의 그루비함은, '째즈 힙합'을 연상시킵니다. 지난 앨범의 수록곡 '좋았던 순간은 늘 잔인하다'와도 닮아있는데, 그루비함은 간결함과 그루함은 더 합니다. 평범한 어느날 무심코 연 서랍 속에서 발견한 시간의 흔적들, 그 상황에서 밀려오는 추억의 그림자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함께 꾸었던 꿈들...결국 모두 나만의 착각이었나요?"

'오늘'은 '선인장'에 이어 다시 심규선이 목소리를 들려주는 트랙입니다. 차분한 어조로 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깊은 울림의 슬픔을 담아냅니다. (가사에서 Alanis Morissette의 Simple together가 떠오릅니다.) 역시 차분한 피아노 연주는  그녀가 묻는 물음들, 그 하나 하나가 마음을 아리게 하고, 마법이 되어 대답을 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네요.

'봄의 멜로디'는 연주곡으로 '손편지'에서 노래한 '봄'을 들려주는 트랙입니다. 하지만 그 봄의 따뜻한 느낌은 어쩐지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려옵니다. 마치 꿈 속에서나 만날 법한 이미지(들을 법한 멜로디)라고 할까요?

"함께 할 수 없지만, 마음과 마음이 닿아있다면, 어디선가 들을 수 있기를..."

마지막 트랙 '유채꽃'은 차세정의 목소리와 함께하는, '유실물 보관소'의 에필로그와도 같은 트랙입니다. 노래하던 봄은 결국 찾아왔고 화자는 유채꽃이 핀 제주도에 왔습니다. 하지만 슬픔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지, 앞선 '봄의 멜로디'가 꿈 속의 멜로디로 들린 것처럼, 화자는 홀로 제주의 언덕에 서있습니다. 담백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는 귀를 간지럽히는 바닷바람같습니다. 그 바람 속에 흩날리는 화자의 목소리는 건조하지만, 눈물인지 파도인지 알 수 없는 습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그리움이 펼쳐진 그 길들을 걸으면서 화자는 무슨 생각에 잠겨있을런지요.

기쁨과 슬픔, 웃움과 눈물이 담겨있는 추억을 보관하는 '유실물 보관소'의 주인을 기다리는 기억들(혹은 유실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잊고 있었던, 잃어버렸던 기억(유실물)을 발견하지는 않으셨는지요? 혹시 그러셨다면, 오늘은 꼭 찾아가길 바랍니다. 내일 아침 베갯잇에 촉촉히 이슬이 내려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별점은 4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