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부터 국내에 '뉴에이지(New Age)' 장르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이미 뉴에이지 음악이 폭넓게 자리 잡은 미국과 일본의 여러 아티스트들이 소개되었고, 한국인 아티스트들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열풍 속에서 데뷔한 '이루마'는 이제 한국 뉴에이지 음악을 대표할 만한 아티스트로 성장했습니다. 거의 매년 전국 투어를 성황리에 마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던 그는 2006년 돌연 군입대를 합니다. 어린 시절 영국으로 건너가서 공부했고 영국 국적을 취득하여 이중 국적이었던 그의 입대 소식을 들었을 때, 안도와 아쉬움이 교차했습니다. 이로서 앞으로 그의 활동에 국적 논란과 군입대 논란은 분명 사라지겠다는 점에서 안도했지만,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이 예민한 감수성을 요구하는 작곡에 어떤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2008년 10월,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바로 발표한 6번째 정규앨범으로 무뎌지지 않은 감수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앨범과 함께 다시 입대 전처럼 활발하게 활동하리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후속 앨범의 소식은 오랫동안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데뷔 때부터 함께 했던 지난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3년의 시간이 흐른 2011년 11월 이루마는 다시 그의 이름을 건 앨범을 발표합니다. 바로 그의 첫 공식 베스트 앨범인 "The Best - Reminiscent 10th Anniversary"입니다. 이루마, 그가 직접 선곡하고 다시 녹음한 기존 발표곡들과 미발표곡, 신곡을 더해 총 17곡을 담은 이 베스트 앨범은, 법적 분쟁을 끝내고 새로운 소속사 '소니뮤직'에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앨범이었습니다. 이 베스트 앨범은 제목처럼 지난 10년 동안의 그의 지난 작품들을 돌아보는 동시에 그만큼의 시간 동안의 변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새롭게 녹음된 곡들은 원곡의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마치 콘서트에서 직접 들었던 그의 연주처럼 자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새 소속사가 바꿔고 처음으로 발표하는 일곱 번째 정규앨범 "Stay in Memory"에서는 그런 변화들을 더 확실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앨범들에서도 물론 그의 곡들은 듣기 좋았지만 정해진 틀에 맞춰있는 느낌이었다면, 이 앨범에서는 그런 틀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아기자기한 느낌이 강했던 그의 지난 대표곡들과는 달리 이번 앨범의 수록곡들은 아기자기하기보다는 틀을 벗어난 자유와 여유는 긴 인고의 시간을 지나 찾아오는 감회와 세월이 녹아들었기 때문일까요?
'Nocturne no.1 in C'는 "Summer Nocturne"처럼 해가 뉘엇뉘엇 지기 시작하는 여름날의 풍경이 떠오르는 곡입니다. 노을을 타고 불어오는 밤바람에 살짝 열린 창문의 커튼은 살포시 흔들리고 긴 하루도 마무리가 되어갑니다. 'Stay in Memory'는 '기억에 머무르다'라는 제목처럼 그리움이 담겨있습니다. 비교적 이루마다운 아기자기한 멜로디가 인상적인데, 그리움과 더불어 얼핏 회한이 어려있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이어지는 'I Could See You'에서도 그런 그리움의 감정은 이어집니다.
'Nocturne no.2 in Eb'는 아늑하고 따뜻한 가족이 모습이 그려지는 곡입니다. 마치 이제는 결혼하고 가족을 이룬 그의 모습처럼 말이죠. 'Impromptu'는 '즉흥곡'을 의미합니다. 원래 슬픈 내용으로 썼던 곡을 바탕으로 즉흥으로 연주했다는데, 비오는 밤 빗소리를 들으며 감성에 빠져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의 도전 정신이 엿보였던 스페셜 앨범에 실렸던 'Happy Couple, Sad Couple 'n Happy Again'은 '이제서야' 피아노 버전으로 이번 앨범에서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사실 이 곡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콘서트에서 들을 수 있던 곡었지만, 피아노 버전으로는 어떤 앨범에도 수록된 적이 없었습니다. 보통 너무 긴 제목 때문에 '해피커플'이라고 줄여서 불리는 이 곡은 긴 영문 제목처럼 행복했던 커플이 시련을 커져 다시 행복을 찾게되는 모습을 그렸다고 합니다. 'Falling in Love'는 사랑에 빠지는 낭만적인 순간은 그려냅니다. 그 사랑은 격렬하기 보다는 평온하고 환희로 충분한 분위기로 들립니다.
'Nocturne no.3 in A minor'는 단조의 야상곡이기 때문인지, 슬픔과 탄식이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소중한 것 혹은 사람을 읽은 밤의 감정을 그려냈으리라 생각되네요. 'Silver line'은 구름을 뚫고 나온 한 줄기 빛을 뜻하는 제목이라고 생각됩니다. 듣고 있으면 한 차례 소나기가 내린 뒤 활짝 개인 하늘의 무지개처럼 밝고 희망적인 기분이 듭니다. 마치 최근 몇 년간 마음 고생을 하고 이제는 평온을 맞이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담고 있을 법합니다.
'Nocturne no.4 in Db'는 이 앨범의 마지막 야상곡으로, 세상 만물이 모두 깊이 잠든 평온한 밤의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그 깊은 밤에는 슬픔도 눈물도 없는, 모두에게 아늑하고 편안한 밤이겠죠? 'The Days that'll never come'은 '돌아오지 않을 날들'이라는 의미처럼 좋았던 시절에 대한 슬픈 그리움이 담겨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그의 곡들처럼 잔잔 슬픔의 잔물결이 아닌, 감정의 격류와 소용돌이가 느껴지는데, 그만큼 그는 지난 시간들 애타게 갈구하고 있나봅니다. 'Painted'는 우리말로 '그린', '색칠한' 혹은 '허식적인', '공허한'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제목입니다. 제목처럼 지금까지 그가 그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화려했던 순간을 지나 공허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작은 희망을 발견하는 일련의 과정을 그려낸 곡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종종 자신을 "뉴에이지가 아닌 세미클래식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해왔습니다. 종교적 오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최종적인 음악적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었다고 생각됩니다. 긴 인고의 시간을 지나고 발표된 이 앨범은, 지난 앨범들과는 확실히 차별되는 변화를 들려줍니다. 피아노로 들려주는 손끝의 표현은 마치 스스로의 구속을 깨고 나와 득도나 해탈한 사람처럼 정해진 형식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움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들은 그의 음악들이 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처럼 들리게 합니다. 앞으로도 이어질 그의 음악 인생에서 앨범 "Stay in Memory"는 새로운 이정표로 기억되지 않을런지요. 별점은 4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