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백불'은 '언젠가 함께 파리에 가자'보다 먼저 읽으려 했던 책이다. 역시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으로, 일본에서는 1997년에 발표되었고 우리나라에는 2011년이 되어서야 출간된 소설이다. 처음 '하얀 부처'를 의미하는 '백불'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는, '백인 승려가 성불을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어리석은 예상이었지만.
요약하자면 강 하구의 작은 섬 '오오노지마'에서 태어났고 그 곳에서 숨을 거둔 '에구치 미노루'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이다. 한 인간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일반적인 성장 소설과 차별점은 청년이 되면 멈추는 '육체적 성장'보다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정신적 성장'을 밀도있게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주인공 에구치 미노루와 그의 가족, 친구들이 겪는 삶과 죽음을 그리면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겪에 되는 죽음에 대해 진지한 성찰로 풀어나간다. 그 이야기들 사이에는 '오토와'와 '누에'에로 표현되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 어린시절의 '기시감'으로 시작되어 딸 '린코'을 통해 밝혀지는 '영혼과 전생' 등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보았을 인생과 그 종착역인 죽음에 대한 '질문과 답변'들이 이어진다.
탄생과 함께하는 피할 수 없는 죽음, 그리고 죽음의 의미와 죽음 뒤의 세계 등, '죽음'이란 나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사후 세계와 전생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서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기에 기억할 수 있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본 사람이라면 더욱 빠져들만한 주제들이 주인공 미노루의 인생과 사색을 통해 진행된다. 이 작품 하나로 답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 미노루와 친구 기요미가 작품 속에서 대화와 행동으로 보여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큰 감명을 받았다.
300쪽이 넘는 짧지 않은 분량에 상당히 많은 야이기와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지만, 물 흐르듯 흘러가는 문장으로 흡입력을 발휘하는 건 작가 '츠지 히토나리'의 특기라고 해야겠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지만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무게를 잡지도 않는다. 일본 작가들에게 종종 느껴지는 사무라이의 '가면 달린 투구'나 게이샤의 '짙은 화장'이 느껴지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정갈하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젊은 시절부터 유럽을 방랑하였기 때문에, 그의 실제 인생처럼 그의 글 속에서도 그런 자유분방한 기질이 엿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에구치 미노루'는 작가의 외조부가 모델이라고 한다. 그의 외조부는 작품 속 주인공처럼 실제로 대장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전쟁 중에는 철포 개발에 종사했고, 발명가가 되었다고 한다. 작품과 다른 점은 작가의 외조부는 전쟁의 부조리와 잘못을 깨닳고 승려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뼈로 만들어진 '백불'도 실제로 승려가 된 그의 외조부가 건립하여, 지금도 오오노지마에 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미노루의 딸 린코가 문필가와 결혼했다는 대목에서 '백불이 실제로 있다면 작가의 집안 조상의 이야기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었다. 실제 역사에 작가의 상상력과 문장이 더해져 완성된 '백불'은 작가의 초기작이지만, 그의 작가 인생에서 '걸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 실제로 '프랑스 5대 문학상' 가운데 '페미나상'을 일본 작가 최초로 수상했다고 한다. 동양적 선(禪)이 녹아있는 이 작품은 프랑스인들에게 신비롭게 다가갔을 법도 하다.
소설 말미에 주인공 '미노루'가 계획한 골불을 실제의 형태로 제작하는 조각가 '이하라 하치헤이'는 작가 자신이 투영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노루와 섬사람들의 뼈가루로 그들의 생사에 대한 염원이 담긴 골불을 완성한 소설 속 '이하라 하치헤이'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로 삶을 뛰어넘는 '불멸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작가로서의 염원과 포부가 전해졌다. 더불어 조각가 하치헤이가 골불을 완성하고 프랑스로 떠난다는 부분에서는 작가의 '프랑스에 대한 애착'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프랑스에 대한 이해와 애착이 그를 프랑스에서 사랑받는 작가로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1989년에 데뷔한 작가의 1997년 작품이니 작가 인생에서는 '초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2011년이나 되어서 번역된 점도 아쉽지만 이 작품 다음으로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지 않는 점은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2014/04/0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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