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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imilian Hecker'의 2005년 작(作) 세번째 정규앨범 'Lady Sleep'.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어색하지만 '수면의 숙녀' 정도가 될까요? 영어 사전을 보면 'Lady'는 귀족의 부인이나 딸의 성명에 붙여쓰는 경칭이라고도 하니, 잠(sleep)을 여성화하기 위한 제목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목부터 '잠'이니, 그래서 제목만큼이나 몽환적인 느낌의 곡들이 많인 수록되어 있는 앨범입니다. 제가 이 앨범과 같이 구입한 4집은 뒷전으로 할 정도로 좋은 앨범이구요. 이 앨범을 들으면서, 특히 제가 배경음악으로 구입할 정도로 마음에 들던 곡들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앨범 수록곡들 모두, 같은 바람이 아닌 각기 다른 '세기'와 '습도'와 '온도'의 바람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바람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Birch', 우리말로 '자작나무'라는 뜻을 갖는 제목의 '찬가'입니다. 도입부의 바람조차 숨을 죽인 고요는 우리를 눈이 쌓인 울창한 숲 한 가운데 이끌고, 그 발걸음은 홀로 달빛을 받으며 서있는 은빛의 자작나무에서 끝납니다. 갑자기 격정적으로 흐르는 노래처럼, 순간 자작나무를 감싸는 회오리바람이 불어 시야를 가립니다. 노래가 끝나면서 바람이 멈추면 자작나무는 온데간데 보이지 않고 달빛만 밝습니다. '찬가'라고 소개한 이유는 가사때문입니다. 가사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Anaesthesia', '마취' 혹은 '무감각'이라는 제목을 가진 곡입니다. 겨울을 녹이는 초봄의 미풍같은 느낌이고, 가사를 살펴보아도 제목처럼 상당히 세상의 모든 일을 잊을 법한 '황홀함'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황홀함 속에서 안타까움도 느껴집니다. 특히 마지막 가사 'Oh my lord, I will be'에서 그렇습니다. 간주에서 아득히 들리는 '라라라'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듯 합니다. 혹시 이런 황홀함이 '바람 앞의 촛불'같은 상황일까요? 아니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인지도 모릅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처럼 말이죠.

'Summer days in bloom',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 곡입니다. 화창한 이른 여름의 오후, 숲이 울창한 공원의 나무가지 사이로 눈을 간지럽히는 햇살, 사랑하는 이와의 데이트. 이보다 아름다운 장면이 또 있을까요?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 속 사랑하는 이와의 산책, 세상은 멈추고 이 순간이 영원히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행복에 눈물겨울 뿐입니다.

'Everything inside me is ill', 제목만큼이나 흐린 가을날의 바람같은 곡입니다. 하늘은 흐린 잿빛, 낙엽이 진 길을 거니는 청년의 우수가 느껴집니다. 바람에 거리의 낙엽도 청년의 머리카락과 옷깃도 흩날립니다. 슬픈 청춘은 어느 곳을 향하는 걸까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요?

'Help me', 자연에 의한 바람보다는 사람의 움직임에 의한 바람이 떠오릅니다. 짙은 어둠 속 눈분신 은반 위로 잔잔히 내리는 눈과 그 속에서 홀로 춤추는 이의 몸짓에 따라 바뀌는 바람이 그려집니다.

'Dying', 제목에서부터 쓸쓸함이 절실히 느껴집니다. 굵은 눈발이 내리고 인적이 없는 황량한 벌판을 걷는 한 사람을 떠오르게 합니다. 눈물마저도 얼어붙게 하는 눈보라에서도 'I'm dying'이는 처절한 외침은 묻히지 않고 메아리가 되어 퍼집니다. 아니, 이미 입끝을 떠나자마자 거센 바람 속에 묻혔지만, 가슴 속에서는 울려퍼지고 있지도 모릅니다.

'Lady Sleep', 자장가같은 곡입니다. 그래서 열린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꿈나라로 가는 길을 배웅하는 잔잔하고 포근한 바람입니다. 몇 십초의 정적이 끝나면 히든 트랙이 이어집니다. 꿈나라의 모습일까요? 앨범에 전반으로 흐르는 쓸쓸함과는 다르게 밝고 희망찬 느낌입니다. 행복한 꿈을 꾸는 밤인가봅니다.

'The days are long and filled with pain', 보너스 트랙으로 Maximilian Hecker'의 동료가 부른 버전이 실려있습니다. 조금은 서늘하고 조금은 건조한, 긴 여름을 지나 가을의 문턱의 바람같은 곡입니다. 길고 지루한 여름같은 사랑이 끝나고 이별의 문턱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할까요? 그래서 노래는 절망적인 만큼 희망적이기도 합니다. 'There's still a lot for us to see in this life.'이라는 마지막 가사처럼요. 과연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요즘 제가 듣는 외국 앨범들은 정말 한 손의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지만, 하나같이 주옥같은 앨범들이고 이 앨범 역시 그렇습니다. 아직 Maximilian Hecker의 모든 앨범을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우수로 가득찬 감수성은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곡 하나 하나가 너무나 좋고, 그냥 CD를 CDP에 넣고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도 건너뛸 트랙이 없을 정도 앨범의 흐름도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오래 많이 들었지만, 이 앨범에 질리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법 합니다. 별점은 4.5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