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톤 프로젝트(Epitone Project)'의 두 번 째 정규앨범 '낯선도시에서의 하루'.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파스텔뮤직' 소속으로, 이제는 파스텔뮤직의 대표 아티스트이라고 할 만한 '에피톤 프로젝트(차세정)'가 두 버째 정규앨범으로 찾아왔습니다. 파스텔뮤직과 계약 이후, 2009년 기존 발표곡들을 모은 스페셜 앨범 '긴 여행의 시작', 2010년 첫 정규앨범 '유실물 보관소'를 발표했고, 2011년에는 'Lucia(심규선)'과 함께 'Lucia with Epitone Project'라는 이름으로 '자기만의 방'을 발표하면서 파스텔뮤직 소속의 어느 뮤지션들보다도 꾸준히 달려오고 있는데, '2012년'도 쉬어가지 않고 '대표 뮤지션'으로 쐬기를 박을 기세인지 두 번째 정규앨범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를 발표했습니다.

수록곡들을 살펴보면서 눈에 띄는 것은 지난 두 장의 앨범과는 다르게 여성 보컬의 곡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여성 보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곡은, 이제는 에피톤 프로젝트의 '여성형 페르소나'라고 의심할 만한 '한희정'과의 듀엣곡 뿐입니다. 'Lucia with Epitone Project'로 여성 보컬곡을 모두 소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에피톤 프로젝트의 달라진 '음악적 어조'나 또 다른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 흥미롭게도 스페셜 앨범과 정규앨범 두 장의 앨범 제목들을 살펴보면 '여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목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긴 여행 시작하고(긴 여행의 시작), 잃어버렸던 기억들을 되찿아(유실물 보관소) 낯선 도시에서 경유하는(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일련의 과정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적 여정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그 끝이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교통방송처럼 들리는 배경음으로 시작하는 '5122'는 제목의 의미부터 궁금해지는 인트로 곡입니다. 4자리 숫자로된 곡 제목은 'Olafur Arnalds'의 앨범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 앨범의 제목을 생각한다면 '낯선 도시'로 떠나는 항공편의 번호나 철도편의 번호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단순하게도 총 51분 20초대인 이 앨범의 재생시간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낯선 도시를 담은 사진들이 담겨있는 아이폰 속 사진첩의 비밀번호일까요?) 우아한 3박자의 춤곡 '미뉴에트'는 곧 도착할 '낯선 도시'에 대한 조금의 설렘과 조금의 두려움의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춤곡에 이어지는 '이제, 여기에는'는 리듬감과 -지난 두 앨범을 들었다면 차세정, 그의 곡들에게는 그다지 어울지 않는 단어인- 진취적인 느낌이 전해지는 보컬곡입니다. 이 앨범을 포함한 그의 세 장의 앨범 모두, 첫 두 곡 정도는 이 리듬의 도드라집니다. 공연을 염두한 의도적인 곡 배치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연의 오프닝에 배치하기에는 딱 좋은 곡들이라고 생각되거든요. (그가 파스텔뮤직 소속이 되면서 그의 노래들은 계속 들어왔지만 공연을 직접 본 일은 없어 확인할 길은 없네요.)

'시차', 상당히 지리적이며 과학적인 단어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수성을 자극하는 단어인가 봅니다. 애써 담담하고 태연하려는 모습 넘어로 뭍어나는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의 감정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시차'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떠오르게 합니다.

"먼 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곳은 새벽인데 그곳은 밤이라 합니다.
이렇듯 우리 사랑에는 시차가 있는가 봅니다.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돗한 그리움뿐,

나는 새벽인데
그대는 밤이라 합니다."

물론 이 시에는 마음의 시차를 이야기하고 노래는 실제적인 '시차'에 속에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이지만, 결국 '누구와도 같지 않으니 누구라도 다른 거니까' 닿을 수 없는 안타까움은 닮아있지 않나요? 영어의 관용적인 표현인지 영미권 노래들에서 종종 사랑의 변화를 계절에 변화에 빗대어 표현하곤 하는데(이제는 우리나라 노래에서도 많이 이용하는), 그 만큼이나 '시차'의 문제는 생각해 볼 만합니다. 사람의 관계에서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마음의 시차'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 앨범에서 유일한 듀엣곡이자 유일하게 여성 보컬을 들을 수 있는 '다음날 아침'은 '한희정'과 함께한 곡입니다. 그녀의 듀엣은 '그대는 어디에'와 '이화동'에 이어 세 번째인데, 앞선 두 곡이 '절정'에 위치한 곡이었다면, 이 곡은 상당히 차분한 '전개' 정도가 되겠습니다. 또, '그대는 어디에'나 '이화동'에서 그녀는 보컬과 코러스를 오가는 피쳐링(featuring)으로 '여성보컬로서의 매력'을 들려주었다면, 이 곡에서는 차세정과 비슷한 비중의 '듀엣(duet)'으로 '한희정으로서'의 진정한 매력을 들려줍니다. 건조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매력은 그녀의 새 앨범을 더욱 기다리게 만듭니다.

'다음날 아침'이라는 제목에서, '그럼 전날은 무슨 날이었나?' 궁금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영화나 소설에서 중대한 사건이 있고 다음날의 시작을 알릴 때 쓰이는 자막이나 문구인 '다음날 아침'에서 따온 제목이 아닐까요? '눈을 떠보면 새로운 아침이..'라는 가사가 있어서, '눈을 뜨면'이 생각나는데 가사의 내용도 적당히 개연성이 있게 들립니다.

일상의 시간 순서로는 어색하지만 '다음날 아침'의 다음 곡은 '새벽녘'입니다. 기억과 추억, 인사와 눈물이 뒤범벅이 된 가사는 '눈을 뜨면'으로 대표할 수 있는 에피톤 프로젝트의 감성을 다시 한 번 들려줍니다. 유희열의 청승과 윤상의 세련미가 만난 음악이 바로 에피톤 프로젝트의 매력이 아닐런지요. '초보비행'은 어찌 들으면 소박한 청혼같은 노래입니다. 감성을 울리는 슬픈 노래들이 대다수인 에피톤 프로젝트의 곡들에서 이런 따뜻한 감성의 노래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노래가 전하지 못한, 혼자만의 바람과 공허한 혼잣말처럼 들리는 사람은 저 뿐인가요?

'국경을 넘는 기차'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연주곡입니다. 앞선 두 앨범에서는 적지 않은 연주곡이 아쉬웠는데, 이 앨범에서는 intro와 outro를 제외하면 유일한 연주곡이라 오히려 반갑습니다. 듣고 있으면, 철로 위를 조급하게 달리는 기차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치는 풍경들처럼 적당한 속도감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이 전해집니다. 그 여행의 감정 덕분에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드는 곡입니다.

'떠나자'는 이 앨범의 절정이라고 할 수있는 곡입니다. 수록곡 순서대로 콘서트가 진행된다면 이 곡 즈음에서 꽃가루도 날릴 법합니다. 가사를 잘 음미하면 '낯선 도시'의 정체가 조금은 보입니다. 아마도 '낯선 도시'는 처음 가본 진짜 낯선 도시면서, 동시에 이제는 기억 속에 묻어둔, 가사를 빌리자면, '우리 함께했던, 우리 사랑했던 수많은 날'을 보낸 '다정했던 이 도시'라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을 열어보면 잠깐 동안만 방문할 수 있는 그런 도시가 바로 '낯선 도시' 아닐까요? '긴 여행'을 떠난 그가 '유실물 보관소'에서 찾은 추억은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였으리라 봅니다.

트럼펫 연주에서 아련한 그리움이 전해지는 '우리의 음악'은 앨범이 결말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가사는 앞선 노래 '떠나자'에서 했던 유추들을 확인시켜 줍니다. 마지막 가사 '오늘처럼'은 바로 추억 속 그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와 같아보입니다. '이제, 여기에서'는 그 낯선 도시에 도착한 설렘이 되겠고, '다음날 아침'은 그 짧은 하루를 보낸 아쉬움이 되겠구요.

잔잔하게 시작해서 점점 스케일을 키워가는 '믿을게'는 앨범과 공연의 피날레에 어울리는 곡입니다. 이별에 대한 담담하게 절제된 목소리는 처절한 감정의 표출보다 오히려 더 눈물겨울 때가 많은데, 차세정은 가창력이 출중한 보컬이라고 할 수 없어도 이런 효과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클라이막스에서는 소리내에 울지 않는 울음이나 조용히 흐르는 눈물처럼 감정을 흔들어 놓습니다.

'터미널'은 제목처럼 앨범을 닫는 곡입니다. 하지만 터미널은 모든 여정이 끝나는 동시에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기에  사랑의 여행이 끝나고 이별의 여행은 이제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이 곡까지 들으면서 꿈 같은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가 왠지 영화 '인셉션'의 림보 속 도시에서의 일상과 겹쳐졌습니다.) 또 다른 시작을 암시하듯, 마지막 '미뉴에트'는 또 다른 시작을 암시하는지 '5122'과 같은 멜로디입니다. 하지만 춤곡이라고 하기에는 쓸쓸한 피아노 연주는 사랑이 남기는 슬픈 그림자 같습니다.

기대 유망주였던 에피톤 프로젝트는 이제 음반의 판매량이나 공연의 규모와 흥행에 있어서 파스텔뮤직의 대표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스페셜 앨범과 첫 정규앨범, 그리고 루시아(심규선)과 함께 작업한 앨범을 거쳐 두 번째 정규앨범까지, 꾸준한 창작력을 보여주면서 팬들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음악 활동도 보여주고 있구요. 이번 앨범에서는 자신의 보컬에 더욱 집중하면서 앨범을 관통하는 스토리텔링과 응집력을 들려주었습니다. 또 어떤 이야기로 우리에게 찾아올지 기다려집니다. 별점은 4.5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