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리듬 앤 바비큐 페스티벌을 돌아보다

인턴을 시작하면서 '홍대 죽돌이 생활'을 청산한 나오게는 그때부터 작년까지 새로운 음악을 접할 방법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나, 유튜브, 혹은 온라인샵을 통한 음반구매 정도였다. 하지만 가히 '정보의 바다'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에서 새롭고 취향을 만족하는 음악을 찾기는 쉽지 않아서, 듣거나 구입하는 음원과 음반의 절반 이상은 기존에 들었던 뮤지션이나 밴드의 후속 앨범이나 꽤 연관성이 강한(같은 레이블이라거나, 탈퇴/해체 후 만든 앨범이라거나) 음악들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오랜만에 찾은 음악 페스티벌인 "안산 벨리 록 페스티벌"은 음악적 견문을 넓혀주는 꽤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내 '음악감상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까? 온라인만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세계 음악 시장의 트렌드와 레전드에 대한 예우, 그리고 페스티벌 문화까지 "페스티벌의 매력"를 발견한 점은 큰 수확이었다.

사실 수 년동안 홍대 라이브클럽 공연을 봐왔던 입장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각종 페스티벌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물론 음악팬의 입장에서야 티켓 하나로 2~3일동안 평소 보고 힘들었던 수 많은 밴드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지만, 페스티벌이 많아지면서 홍대 클럽들과 '밥그릇 싸움'처럼 되어가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약간의 비약을 더해서 '현재의 의료 시장'에 비유하자면, '소규모 의원들(=홍대 라이브클럽들)'과 '대형 병원들(=각종 페스티벌)'이 경쟁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클럽들이 동네 의원들처럼 '적당한 진료비에 각각의 전문 분야의 질환을 하나씩 치료해주는 격'이라면, 페스티벌은 거의 모든 전문과을 진료하는 대형 병원이면서 의료 시장과는 다르게 '(다른 의미의 '포괄수가제'로서) 몇 배 비싼 진료비에 일괄적으로 모든 질환을 치료해주는 상황'이라는 할 수 있다. 페스티벌이 많아지면 (금전적 이유 및 접근성 등에 의해) 아무래도 클럽 쪽의 인구가 페스티벌로 빠져나갈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의료시장'과는 다르게 '라이브클럽 문화'는 (클럽과 페스티벌에서 공통적으로 소비되는) '인디음악'를 지탱하는 밑거름으로, 스포츠의 '유소년 시스템'에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밥그릇 싸움이 지속되면 결국 '인디음악'의 기반인 라이브클럽이 흔들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음악시장 전체에는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마치 '유럽 축구'에서 유소년 시스템이 약한 리그는 경쟁에서 도태되는 상황한 비슷한데, 유럽 통합으로 국경이 희미한 유럽 축구에서는 '자본력'으로 어느 정도 만회가 가능하지만, 경계가 '대한민국'으로 명확하게 한정적이고 그 기반도 튼튼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본력이 아무리 커봐야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물론 자금력에 따라 섭외하는 해외 뮤지션들의 (개런티와 비례하는) 인지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외의 라인업을 채우는 국내 뮤지션들은 사실 '돌려쓰기(혹은 돌려막기)'로 여러 페스티벌에 겹치기 출연이 허다한 상황이다.

페스티벌이 많아지면서 페스티벌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치열해졌고, 작년이 그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여름 페스티벌들의 경쟁이 뜨거웠는데, '펜타포트'에서 분리되었던 '지산 밸리'가 다시 '안산 밸리'와 '지산 월드'로 분리되어, 세 페스티벌이 라인업 경쟁을 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올해는 그 휴유증으로 슬그머니 '안산 밸리'와 '지산 월드'가 취소되면서 '공멸' 양상을 보여줬다. 어쩌면, 부지 마련부터 막대한 홍비 비용까지 '과도한 몸집 부풀리기'와 개런티만 천정부지로 올리는 ('제로섬 게임'에 가까운) 라인업 경쟁까지, '치졸한 밥그릇 싸움'의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올해 7월의 '홍성 리듬 앤 바비큐 페스티벌'는 '지속 가능한 페스티벌'의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원래 작년에 가평의 자라섬에서 열렸던 페스티벌을 홍성으로 옮겨왔는데, 지역 축제와 결합하여 '음악 페스티벌'의 또 다른 대안으로 보였다. 홍성의 특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소고기/돼지고기'를 홍보하기 위한 '축제'이자 음악을 즐기는 '페스티벌'로서, '소통'과 '실속'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모습이다. 우선 지역 축제로서 지자체와 협력하여 기존 시설인 '대학교 인조잔디 구장'을 부지로 사용하여 비용을 절약하면서도 편안한 관람을 위한 실속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3일의 축제 기간 동안, 하루의 라인업을 한 레이블에 온전히 할당하면서 (다른 페스티벌과 비교했을 때) 섭외 개런티도 상당히 절감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비용 절감은 '(예매 기준으로) 1일권 2만원'이라는 저렴한 티켓 가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음악성을 인정받은 레이블들을 섭외해서 '음악 페스티벌'로서의 '안정성'과 부담없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실속'을 모두 잡았다고 하겠다. 참여 레이블 입장에서도 '레이블 콘서트'를 겸하는 '레이블 홍보'의 무대로서 꽤 괜찮은 페스티벌이 아니었을까?

다만, 서울에서는 조금 먼 '충남 홍성'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홍보가 부족했을까? 꽤 괜찮은 라인업과 저렴한 티켓 가격을 생각한다면 관람객이 많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역 축제와 결합한 페스티벌의 첫 걸음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펜타포트와 안산 밸리의 '진흙탕'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인조잔디 구장'은 음악 페스티벌을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교통/숙박 및 기타 부대 시설을 확충하고, 라인업을 늘려서 오후 3~4시나 되어야 시작했던 공연을 조금 더 당긴다면 더욱 알찬 페스티벌이 되리라 기대해본다.
2014/07/29 01:49 2014/07/29 01:49

반복되는 군대 총기 사고에 대한 단상

GOP 총기 난사 사고 이후 재발을 위한 방지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모두 헛소리로 보인다.
그저 희생양을 찾고 있을 뿐이다.
군대 총기 난사 사건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마 5년 후, 10년 후에도 반복되리라.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병 임금의 현실화 뿐이다.
공식적인 휴가를 빼면 사실상 24시간 근무라고 볼 수 있는 현재의 징병제에서,
식비, 의복비 등은 국가에서 제공하니
하루 8시간씩 잡고 30일을 곱해서 240시간 정도의 월급은 시간당 최저임금 이상으로 지급해야 정상 아닐까?
적절한 보상이 없는 의무는 애국심을 가장한 착취일 뿐이다.

분명 지금 군에는 첨단 과학 기술로 대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하지 않고 있다.
왜냐면 한달에 10만원 수준의 사병 월급은 그런 첨단 장비들을 도입하고, 유지보수하는 비용에 비교한다면 0에 가깝기 때문이다.
노동의 가치가 0에 수렴한다면, 사병은 소모품이 된다.
식당에서 그릇 세척을 모두 '식기 세척기'에 의존할 수도 있겠지만,
비용-효율적인 면에서 최저임금이 저렴하기에 인력을 사용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정상 수준의 임금이라면, 사병의 가치는 더 이상 소모품이 아닌 보호해야할 자원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로 생각해도,
값어치 있는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좋은 무기와 좋은 보호구가 지급됨은 당연하고, 복리 후생도 더 좋아질 수 밖에 없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결국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또, 군의 전반적인 보건복지와 의료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미국의 Surgeon General 수준의 지위와 권한은 갖는 의사-군인이 필요하다.
징병제에 따라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대부분의 남성이 군인으로 복부하는 상황에서 그 보건의료정책은 민간의 정책과 따로 생각할 수 없다.
국가 위기 상황과 같은 비상시 상황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국민 보건의료 정책의 구심점이 이 직책이다.
이는 전문가를 그 분야의 중책에 앉혀야 한다는 주장과 상통하는 부분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제시한 근본적인 해결책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런 해결책을 정부의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낙관적인 시각으로 봐도, 이런 주장들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년 정도는 지나야 한다고 본다.
나를 포함해서 어떤 다른 사람들은 이 땅에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거나, 그 수준의 대격변이 있어야만 가능하리라 본다.
2014/07/14 17:06 2014/07/14 17:06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부끄럽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실의 시대'를 이제야 읽었다. 사실 2010년에 새책으로 구입했고  2011년부터 읽기에 도전했는데, 초중반을 넘어가면 읽기가 어려워져 두 번이나 중단을 했었다. 왜 그랬을까? 문학 서적을 읽을 때는 그런일이 없었기에 아이러니할 뿐이다.

수필집인 '무라카미 라디오'와 단편소설집인 'TV피플'을 제외하면 내가 읽은 하루키의 장편소설은 순서대로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1Q84' 정도로, 그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초라한 수준이다. 세 작품은 떨어져있지만 관련있는 '두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실의 시대는 이 세 작품과는 다르게, 다분히 '연애소설'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는 어느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고 노화를 시작하지만 정신은 육체와 다르게 죽는 순간까지도 성장이 가능한 점처럼, 연애소설이면서도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연애, 사랑 역시도 삶의 한 과정이고 성장의 한 과정이기에 연애소설과 성장소설의 공통분모는 꽤 많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의 삶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요소가 아니던가?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슬픔과 낭만, 결핍과 공허가 공존하는 소설'이라고 하고 싶다.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19세에서 20세로 넘어가는 시간을 위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절은 사랑의 슬픔과 낭만이 공존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성장의 과정'에서 뭔가 '결핍'된 사람들이다. 결국 죽음으로 영원히 함께한 비운의 연인 '기즈키'와 '나오코'에게는 성인에게 필요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용기' 혹은 '자아 성장'이 부족했다. 선배 '나가사와'는 세상을 사랑하는 '포용' 혹은 '너그러움'이 결핍되었고, 그를 사랑했지만 결국 죽음을 선택한 '하쓰미' 역시 '현실감각' 혹은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정상에 가까웠던 '레이코' 역시 비슷한 이유들로 정신병을 앓았다. 그나마 와타나베를 구원할 수 있는 '미도리' 역시도 성장 과정에서 '애정'이 결핍되어 애정에 큰 갈증을 느끼는 여자였다. 상당히 견고하고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 역시도 그 고지식함은 아주 '미세한 균열' 같은 결핍에서 기인했으리라 생각된다.

하루키의 비교적 초기 작품이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이 잘 녹아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다분히 현실 세상인 '도쿄'와 나오코와 레이코가 머물었던 '환상 속 세상' 같은 '아미료'로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하루키의 인기 소설들의 공통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주인공 와타나베의 모습은 하루키의 소설들 속 견고하고 건실한 주인공의 전형이고, 무뚝뚝한 미도리 아버지의 모습 역시 하루키 작품들 속의 전형적인 아버지 모습과 닮아있다. '미도리'로 대변되는 '구원자' 역시도 공통적인 요소이다. 미도리에게 전화하면서 끝나는 장면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음악이 빠질 수 없는데,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비틀즈(the Beatles)'의 곡 'Norwegian Wood'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목의 유래처럼 작가 하루키의 '문화적 취향' 역시도 잘 녹아있어서, 음악과 문학에 관한 그의 사랑이 엿볼 수있다. 그가 사랑하는 음악은 클래식과 째즈 그리고 올드팝 정도로, 그가 존경하는 '스콧 피츠레럴드'로 대변되는 그의 '문학적 취향'처럼 '음악적 취향'도 상당히 미국적이라는 점이 재밌다. 원제 '노르웨이의 숲'은 다분히 '아미료'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이 유럽에서 쓰여졌다기에 그 영향일까도 생각했지만, '노르웨이'가 있는 '북유럽'이 아닌 지중해 연안의 남유럽 국가인 '그리스'와 '이탈리아'란다. 하루키는 그 온화한 날씨 속에서도 '노르웨이의 차가운 숲'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이 소설이 겨우내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작품은 70년대 말 대학생들의 사회 저항 운동인 '동맹 휴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질풍노도처럼 어지러웠던 주인공 와타나베의 '내면 세계'만큼이나 세상도 어지러웠고, 그렇기에 '세상을 보는 가치관'과 직결된 그 결핍들이 더 크게 부각되었을 수도 있겠다. 마침 이미 알고 있는 일본 노래이자, 이 실패한 저항 운동이었던 '동맹 휴학'을 배경으로 하는 노래인 '모리타 도지'의 '우리들의 실패'가 떠올랐다.

역시 매우 재미있고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그만큼 슬프고도 아픈 소설이다. 죽음 역시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껴안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앞으로 내가 겪게될 죽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을 뻔했다. 젊음이란 아름답지만 그만큼 덧없고 슬프다. 의미 없이 허비된 내 지난 젊음 때문이었을까? 나에게는 너무나도 공허하면서도 아리게 다가왔다.

1987년에 발표된 소설이기에 국내에도 다양한 출판사에서 다양한 번역가에 의해 출간되었다. 내가 읽은 '상실의 시대'는 가장 널리 판매되었다고 할 수 있는 '문학사상'의 책으로, 1989년 초판이 출간된 후 2010년에 나온 3판이다. 최근에 나온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가의 '노르웨이의 숲'도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다.
2014/07/14 01:58 2014/07/14 01:58

현대 의학에 대한 단상

"의학은 분석적이지만 한의학처럼 통합적이지 못하다.

의학은 인간을 기계로, 장기를 그 부속품으로 보고 치료하지만,

한의학은 인간을 유기체로 보고 인체의 모든 장기를 통합적으로 고찰하여 치료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의학과 한의학을 구분해서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

의학도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 한의학처럼 경험 중심의 의학이었고,

그야말로 다듬에 지지 않은 학문이었을 게다.

음양오행, 사상의학...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주장한 '4대 원소설'과 뭐가 다를까?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의학도 한의학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분명 미개하고 미신적인 요소도 많은 학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경험에 이론과 실험을 통한 검증이 합쳐지면서 끊임없이 발전했고, 그 진보는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수백년전 저서에 기댄 한의학이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라면,

끊임없이 나아가는 의학은 아직도 진화를 멈추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다.

아직도 현생인류를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구분하는 사람이 있을까?

의학과 한의학의 관계도 그렇다.

...

의학이라고 신이 내려줬다거나 외계인이 던져준 외계문명에서 기원한 학문이 아니다.

그 근본은 결국 인류의 경험과 노력의 결정체이다.

시대의 변화와 필요에 얼마나 적응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가 그 차이를 만들었을 뿐이다.
2014/07/09 23:37 2014/07/09 23:37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 - 앨런 와이즈먼

200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에서 도서/영화/TV시리즈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현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포스트묵시록(postapocalypse)'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좀비물'의 인기인데, 1950년대 소설을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비롯한 '좀비 영화'는 역시 최근 소설을 각색한 영화 '월드워Z'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TV시리즈로는 '워킹 데드'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2007년 미국에서 출간되고, 2008년에 국내에도 소개된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도 일면에서는 그런 '종말적 재앙 뒤의 세상'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과 대중문화적 현상에 궤를 같이하는 책이라고 할 수있겠다. 하지만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흥미 위주로 쓰여진 소설이나 영화들과는 다르게,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정교한 과학적 예측이 첨가된 논픽션이다. 작가는 고고학, 생물학, 화학, 해양학, 토목건축학 등 과학의 각 분야들(그리고 그 세부 분야들)의 전문가들과의 협조로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등지를 돌며 인간이 없었던 과거와 인간의 등장 이후, 그리고 인간이 사라진 후의 세상까지 다각도로 조명한다.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서 '스미스 요원'은 '네오'에게 '인간은 바이러스와 같다'고 말한다. 지구와 대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숙주에 침투하여 숙주를 이용하고 결국에는 파멸로 몰아가는 지독한 '바이러스'처럼, 인류도 '지구'와 '대자연'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면서 그 혜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구와 대자연을 파괴하고 결국에는 인류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인류가 유인원에서 벗어나 도구를 사용하고 문명을 개척해나간 역사는 '파괴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 속에서도 '수렵 생활 동안 자행된 인류의 (전격전에 비유되는) 대학살과 그로 인한 대형 포유류의 멸종 가능성'과 '농경 생활에 따라 자행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숲과 목초지의 대파괴'를 언급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화석 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한 최근 2세기 동안에는 그 파괴가 더욱 가속되었고, 인류 등장 이후 어느 순간보다 더 많은 생물종이 멸종되고 있다.

결국에는 '자연과의 조화와 자연 보호'의 메시지를 던질 수 밖에 없는 책이지만, 그 이상의 지식을 전달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아직도 코끼리나 코풀소, 하마와 같은 대형 포유류들이 건재하는 아프리카 대륙과는 다르게, 현재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형 포유류가 서식하지 않는 이유는 꽤나 충격적이다. 상당히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아메리카로 건너간 인류의 '전격전에 가까운 대량 학살'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인간의 본성은 본래 (역시 다분히 인간 중심의 가치 판단이기는 하지만) 바이러스처럼 '악하고 파괴적'이라는 생각을 들게한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친환경 플라스틱' 혹은 '광분해 플라스틱'이라고 알고 있는 플라스틱들도 자연에서 완전히 분자 수준까지 분해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게 분해되지만, 현미경으로는 보이는 수준이어서 결국 바다의 미생물들이나 작은 생물들에게 먹이로 오인되어 흡수되고 먹이 사슬을 따라 상위 포식자로 갈 수록 농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상당히 께름칙할 따름이다.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와 희망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비교적 중립적이다. 우리 인간이 없어지면, 인류가 길들였던 몇 종의 동물과 식물들을 제외하면, 아프리카 세렝게티를 비롯해 여러 대륙 곳곳에 아직 상처 없이 남아있는 산과 숲과 들에서 동식물들이 처져서 대부분은 (감정이 있다면 아마도 기쁘게) 다시 번성하리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인류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가까운 바다에도 회복의 희망은 남아있다고 한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지만, 분명 '세상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성경을 기초으로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비꼬는 의도도 엿보인다. 하루 아침에 인간이 모두 사라지거나 갑자기 대부분의 생물종들이 멸종하지는 않겠지만, 저자가 소개하는 멸종을 늦추고 조화로 나아가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역시 기독교적 세계관 만큼이나 극단적이다. 결국 지구를 소모하는 인간의 수를 줄여야하고, 그 수를 줄여나가는 현실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은 '출산 제한'이다. 한국의 성공적인 '산아 제한 정책'이 떠오르는 부분이기도 한데, 엄마 한 명에 아이 하나로 제한한다면 21세기의 끝자락에는 현재 60억이 넘는 인류를 그 절반 정도까지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확실하지만 쉽지 않은 방법이다. 다행히도 산업화된 많은 나라들에서 출산율이 과거에 비해 떨어지는 추세를 보이는 점은 희망적이다. 하지만 역시 아직도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

과연 그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이라는 부하를 지구와 대자연이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인류가 22세기와 23세기, 그리고 더 먼 미래의 시간들을 지구에서 보낼 수 있을까? 결국 화석으로만 기억되는 공룡처럼 되지는 않을까? 인류도 아직까지는 '지구'라는 단 하나의 행성에 의존하는 종족이기에, 소행성 충돌이나 빙하기 같은 자연 재해에는 당해낼 수 없겠지만, 인류의 '멸종 원인'이 어리석게도 '우리 자신'이 아니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바로 지금이 지구와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을 위한 작은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전문적으로 공부하거나 전문 서적을 읽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고고학/인류학적 사실과 미국과 미국의 대도시들의 자연사, 그리고 최근 인류가 이뤄낸 다방면에서의 과학적 성취까지 전달해주는 점은 흥미롭다. 다만, 꽤 길게 늘어지는 문장들에서 부자연스럽고 매끄럽지 못한 번역은 아쉽다.
2014/07/07 00:48 2014/07/07 0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