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20대의 비망록... live long and prosper!
'롤링홀'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때가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는데, '9와 숫자들'의 단독 공연이 열린다기에 오랜만에 발걸음을 옮겼다. 공연 제목은 "9와 숫자들 두 번째 작품 '유예' 발매 기념 콘서트"로 거창한 제목이지만, 사실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및 연말 시즌이기에 '발기 기념' 및 '연말 정산(?)' 공연이라고 봐도 되겠다. 물론 12월 22일이라는 날짜는 좀 애매하지만, 때가 때이니 만큼 장소 섭외도 쉽지 않았으리라.
7시 시작인 공연은 6시 30분부터 입장을 시작했고, 예매순서로 입장순서가 정해지기에 '얼리버드'로 빨리 예매했지만 빠른 입장번호는 아니었는데도 다행히 앞쪽에 앉을 수 있었다. 이미 12월 초에 단독공연과 비슷한 '공청회'를 보았기 때문인지, 공청회와는 어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셋리스트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더불어 오랫만에 듣는 게스트들의 이름에서 근황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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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와 숫자들'의 EP '유예'가 발매되면서 몇몇 온라인샵에서 '발매 기념 공청회' 초대 이벤트가 진행됐었다. '공청회'라니, 무슨 정부기관의 정책 발표회나 고위 공직자의 인사 청문회가 생각나는 어색한 단어인데, 음반을 같이 듣는 모임이 아니라 '9와 숫자들'이 직접 수록곡들을 들려주고 팬들과 이야기하는 일종의 '팬미팅' 같은 자리이기에 다녀왔다. 그런데 장소가 특이했다. 공연장이나 클럽이 아니라 강남 논현동에 위치한 '달콤 커피'란다. 처음 듣는 장소라, 홍대 근처에 많은 이쁜 카페 같은 곳으로 생각했다.
최근 몇년 사이에 각종 페스티벌이 난립하기 시작한 5월, 페스티벌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트위터를 통해 그런 고민을 해결해줄 공연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봄철의 낭만"이라는 제목으로, 요즘 이틀이 대세인 페스티벌들과는 달리 단 하루, 오후에만 열리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리고 '9와 숫자들', '오지은', '로로스', '연진' 등 제가 좋아하거나 보고싶은 팀들로 이루어진 '종합선물세트'같은 라인업이기에 망설임 없이 예매했죠.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공연장이 서울 홍대 근처의 클럽이 아닌,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춘천 어린이 회관'의 야외무대라는 점이죠. 제가 있는 곳에서는 편도로만 260km 가까이 되는 상당히 먼 거리니까요.
"봄철의 낭만"은 밴드 밴드 '마이티 코알라'를 중심으로 '밝고 건강한 아침을 위하여'(줄여서 '밝건아', 마이티 코알라의 데뷔앨범 제목이기도 합니다.)라는 모임에서 '봄 소풍'을 컨셉으로한 공연입니다. 장소가 춘천이기에 오후2시부터 7시까지로 예정된 공연 티켓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춘천까지 왕복 차편과 점심식사가 포함된 일종의 '여행상품'같은 패키지도 예매가 가능했습니다. 드디어 5월 19일이 되었고 저는 먼 거리를 운전해야하기에, 더구나 교통체증을 예상되는 서울을 우회해서 국도로만 춘천까지 가기로 했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간단한 식음료를 챙겨 출발했습니다. 국도이기에 무려 5시간 가까이 운전을 해서 '춘천 어린이 회관'에 도착했습니다. 가평에서 주유를 했는데 다행히 경유는 제가 주로 가는 도시들에 비해 저렴한 편이었고, 셀프세차 비용도 저렴하여 (예비세차 500원에 1분30초!) 오랜만에 세차도 하고 비교적 넉넉하게 도착했고,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공연이 열리는 춘천 어린이 회관의 위치는 춘천에서도 상당히 외각이어었기에 "왜 이런 곳에서 공연을 하나?"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회관 뒤쪽 정원과 그 넘어 펼쳐진 북한강의 풍경은 그런 의문을 한 번에 날려버렸습니다. 혼자 와서 보는 것이 너무나 아까울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고, 날씨도 너무나 좋아서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먹는 도시락 너무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좋아서 내려쬐는 햇살은 대지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햇살을 그대로 받는 야외무대의 모습은 공연관람의 쉽지 않음을 예상하게 했죠.
첫 순서는 바로 밴드 '라이너스의 담요'의 보컬 '연진'이었습니다. '라이너스의 담요'나 '연진'의 노래는 많이 들었지만 공연은 처음이었습니다. 첫 무대부터 공연을 도와주는 '세션'의 돌려막기가 시작되었는데, 연진은 역시 공연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영훈'을 기타세션으로 함께 했습니다. 'Labor in Vain'과 'Misty' 같이 분위기있는 곡들과 너무나도 유명한 'Picnic', 듀엣곡이지만 혼자 부른 'Gargle'을 들을 수 있었고, 그녀가 EBS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곡으로 '승수'(원래는 '프랭키'나 마이티 코알라의 멤버 '승수'가 곰을 닮아서)와 '쿠키송'을 들려주었습니다. 커버곡으로 'Cheek to cheek'이라는 곡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발랄한 모습은 '봄 소풍'에 딱 어울리는 이미지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녀가 아이폰을 잃어버려 분노했던 점과 그런 그녀를 놀리던 세션 이영훈의 모습이었습니다.
다음 순서는 '마이티 코알라'였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클러 빵'에서 공연을 한 번 보았고, 멤버들의 학업 문제로 자주 활동하기 어려웠던 밴드로 아는데, 작년에는 데뷔앨범도 발표하고 공연도 시작했나봅니다. 오래전의 기억으로는 밴드 이름처럼 귀여운 이미지였는데, 생각보다 시니컬한 곡도 부르는 밴드더군요. 드러머 '유병덕'은 바로 멤버 변동이 잦았던 '9와 숫자들'의 현재 드러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돌려막기 기타 세션으로 역시 '9와 숫자들'에 합류했고 원래 '프렌지'의 멤버인 '유정목'이 등장하였고 앞으로 쭈욱 등장하게 됩니다. 한 번 보았던 예전 공연에서도 신선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Bob', '에이프릴', '매일매일 누워' 같은 곡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이시스트가 메인보컬인 '고속도로'는 시니컬한 가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세 번째 밴드는 바로 제가 먼 춘천까지 갔던 이유라고 할 수 있는 '9와 숫자들'이었습니다. 작사/작곡 및 보컬을 담당하는 '9'를 비롯하여 '9'와 함께 '그림자궁전'의 멤버였던 베이시스트 '꿀버섯', 그리고 앞선 무대에 섰던 두 사람 '마이티 코알라'의 드러머 '유병덕', '프렌지'의 '유정목'의 구성은 작년에 보았던 공연들과 같았습니다. 결성 후 첫 앨범 발표까지 멤버 변동이 잦았는데 이제는 현재의 멤버로 안정을 찾은 모습이네요. '9와 숫자들'이 들려주는 말랑말랑한 감성은 화창한 봄날, 듣는이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지난 번에도 준비중이라는 EP는 올해는 진짜로 나올 모양인지 신곡들이 많았는데, 1집 수록곡 '말해주세요'를 제외하면 모두 1집 미수록곡 및 신곡이었습니다. 9와 숫자들의 매력은 청승맞은 가사를 세련된 밴드 사운드로 포장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매력에 걸맞게 EP에 수록된다면 타이틀이 될만한 '깍쟁이'를 시작으로, '그대만 보였네'와 컴필레이션 수록곡 '서울 독수리'같은 신곡들과 솔로 '9'의 공연에서 들은 기억이 있는 '착한 거짓말'과 '북극성'은 밴드 사운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착한 거짓말'은 솔로 기타. 정말 춘천까지 가는 수고가 아깝지 않은 공연이었습니다. 다만 공연 팀 수가 많기에 많은 곡을 들을 수 없는 아쉬움은 저만의 생각이 아니었겠죠?
'그림자궁전'의 리더, '9'의 또 다른 도전 '9와 숫자들'.
밴드 '그림자궁전'이 2007년 1집을 발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한 활동정지에 들어간 동안,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멤버라고 할 수 있는, '9', 'stellar', 그리고 '용'은 각자 다른 밴드에 몸담고 있으며, 그 중 밴드 그림자궁전를 결성하고 정체성을 만든 리더 '9'는 또 다른 밴드의 리더로 곡을 쓰고, 음반 작업을 하고 간간히 공연을 해왔죠. 그 밴드의 이름은 '9와 숫자들'로 본인의 닉네임(9)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사실 9에게는 이번 앨범이 세 번째 1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1집만 세 번 냈다고 했던 뭐 가수처럼 말이죠.) 이제는 '장기하와 얼굴들'로 유명한 '붕가붕가 레코드'의 시작과 함께한 포크 4인조 '관악청년포크협의회(이하 청포협)'의 멤버 '9'로서 1집이자 마지막 앨범 '꽃무늬 일회용휴지/ 유통기한'에 참여하였고, 역시 '그림자궁전'의 1집이자 마지막 앨범이 될지도 모르는 앨범 '그림자궁전'으로 '두 번째 1집'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번 앨범 '9와 숫자들'로 '1집만 세 번째'라는 흔하지 않은 경력을 완성했습니다.
'청포협'이 멤버 개개인의 사정으로 앨범 발매 후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인디씬에 관심이 조금 있는 분들이라면, 그의 이름은 '그림자궁전'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알고 있을 법합니다. 하지만 9는 그림자궁전 활동 중에는 틈틈히 '포크가수 9'로서의 곡작업 및 '홍대앞 프리마켓'과 '클럽 빵' 등지에서 공연을 하면서, 그림자궁전과는 다른, 또 다른 음악세계로의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사실 게을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정진의 결과물이 '9'라는 이름들 단 솔로 앨범이 아닌, '9와 숫자들'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했습니다.
'9와 숫자들'에 대한 흥미는 이런 9의 음악 활동 경력에서 나옵니다. 밴드 그림자궁전에서 stellar를 프런트로 내세우고 '그림자'처럼 활약했던 점과는 다르게 직접 프런트로 나서고 있고, 닉네임을 밴드 이름의 맨앞에 넣음으로서 '포크가수 9'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곡 '그리움의 숲'은 그림자궁전이나 포크가수 9를 생각했을 때, 상당히 상큼한 출발을 보여주는 트랙입니다. 영미 인디씬의 포크팝을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맑은 로우파이(Lo-Fi) 사운드는 이 앨범이 지향하는 '복고'라는 지향점을 들려줍니다. 뛰어나지 않지만 곡 분위기에 적절한 보컬, 충분히 시적인 가사와 꼭 찬 밴드 사운드는 지난 시간들에 대한 향수로 가득합니다. '너'를 거룩한, 심오한 등으로로 신격화 숲의 초록과 빨간 모자, 빨간튜브 등 빨강이라는 선명한 색의 대비는 농밀한 그리움과 어우려져 청자의 감각을 사로잡습니다.
이어지는 '말해주세요'는 가벼운 팝-락풍의 연가입니다. 좀 더 단백한 9의 목소리로 불려지는 진솔하고 담백한 가사는, 사랑의 무게가 가벼운 이 시점에서, 90년대 이전에 느낄 수 있었던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다시 느낄 수 있게합니다. 가사에 진솔함에 비해, 경쾌하고 조금은 유치하게 들릴 수 있는 연주가 재밌습니다.
'오렌지 카운티'는 제목에서 재치가 느껴집니다. '오렌지족'으로 유명한 '한국의 오렌지 카운티'는 바로 압구정으로, '오렌지족'는 추억 속의 단어를 차용했다고 하겠습니다. 묵직한 타악기 소리는 댄스 플로어의 뜨거운 비트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그 무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구애에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은 그 시절 순박한(?) 청년의 모습을 엿보게 합니다.
이어지는 곡은 뮤직비디오도 만들어지면서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이라고 할 수 있는 '석별의 춤'입니다. '석별'과 '춤'이라는 대비되는 이미지로 인해 이 곡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애틋한 이별의 곡이 되어야하겠지만 춤이라는 부분에 충실하여, 이 앨범에서 가장 댄서블한 트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리지 부기'는 대학생활의 로망을 노래한 트랙으로, 다분히 선정적으로 오해를 살만한 가사들이 숨어있습니다. '슈거 오브 마이 라이프'는 어렵지 않은 가사로 확실한 의미를 전달하는 사랑 노래입니다. 비장한 느낌의 연주로 시작하는 '삼청동에서'는 시적인 가사가 인상적인 트랙입니다. 경쾌한 '옛날 얘기'로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심각해지는 '실낙원'도 그 비장함을 이어가네요.
이미 '그림자궁전' 활동과 병행했던 포크가수 '9'의 곡으로 알려진 '이것이 사랑이라면'은 '9의 숫자들'의 앨범을 통해 되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난 하지 않겠어요'으로 사랑의 환희와 아픔을 동시에 표현해낸 가사는 '9식 화법'의 정수가 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중한 가사와 달리, 조금 가볍고 경쾌한 연주의 대조도 인상적입니다.
'선유도의 아침'은 시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댄스의 느낌이 충만한 트랙입니다. 그 흥겨움에 푹 빠져서 후렴구 '그래 없었던 일로 해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를 따라 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몰라요. '연날리기'는 그 흥겨움을 이어가면서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게 합니다. 더불어 연날리기를 통해 세태를 비판하는 정신이 돋보이는 트랙이기도 합니다.
'디엔에이'는 '그림자궁전'의 소위 '과학 시리즈' 곡들를 연상시키는 제목입니다. 가사 내용은 참으로 과학적인 단어인 'DNA'와는 경원하게 들릴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와 나의 몸속 너무 깊은 곳'에 있는 그것을 DNA에 비유한 재치에 감탄하게 됩니다. '낮은 침대'는 앨범을 마지막 트랙으로 마지막의 느낌처럼 '난 도망가버릴 거에요'라는 외침이 인상적입니다.
포크, 팝, 락, 댄스가 녹아든 '9와 숫자들'의 동명의 데뷔 앨범은 '그림자궁전'과는 전혀 다른 스펙트럼의 보여주는 앨범입니다. 하지만 그 멀어보이는 두 간극 사이에 존재하는 '9의 음악적 DNA'에는 공통적으로 '복고'가 녹아있습니다. 요즘 음악보다는 80년대, 90년대 음악에 가까운 가사와 화법, 멜로디는 9의 감각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소리를 펼쳐냅니다. 특히 댄서블한 사운드는 9가 프로듀싱으로 참여했던 같은 레이블 소속인 '흐른'의 앨범에도 감지된 부분으로, '그림자궁전'의 무기한 활동정지 후(혹은 그 이전부터) 감지되었던 9의 새로운 음악적 지향점이 아닐 하네요. '그림자궁전'의 데뷔 앨범에 이어 향후 2000년대의 처음 10년 동안 인디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을 음반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 확실한 두 번째 앨범을 완성한 '9'에게 경의를 표하며 별점은 5개입니다.
Comments List
보다에서인가 인터뷰를 보니 뭐랄까 9씨도 사연이 많은 밴드 생활인거 같아요. 그림자 궁전이든 숫자들이든 잘되길 바래봅니다.
안녕하세요~! 그런 인터뷰가 있었군요. 찾아봐야겠어요! 무엇보다도 어떤 밴드든 오래 오래 해주었으면 바람이 저에게는 있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