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군대 총기 사고에 대한 단상

GOP 총기 난사 사고 이후 재발을 위한 방지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모두 헛소리로 보인다.
그저 희생양을 찾고 있을 뿐이다.
군대 총기 난사 사건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마 5년 후, 10년 후에도 반복되리라.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병 임금의 현실화 뿐이다.
공식적인 휴가를 빼면 사실상 24시간 근무라고 볼 수 있는 현재의 징병제에서,
식비, 의복비 등은 국가에서 제공하니
하루 8시간씩 잡고 30일을 곱해서 240시간 정도의 월급은 시간당 최저임금 이상으로 지급해야 정상 아닐까?
적절한 보상이 없는 의무는 애국심을 가장한 착취일 뿐이다.

분명 지금 군에는 첨단 과학 기술로 대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하지 않고 있다.
왜냐면 한달에 10만원 수준의 사병 월급은 그런 첨단 장비들을 도입하고, 유지보수하는 비용에 비교한다면 0에 가깝기 때문이다.
노동의 가치가 0에 수렴한다면, 사병은 소모품이 된다.
식당에서 그릇 세척을 모두 '식기 세척기'에 의존할 수도 있겠지만,
비용-효율적인 면에서 최저임금이 저렴하기에 인력을 사용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정상 수준의 임금이라면, 사병의 가치는 더 이상 소모품이 아닌 보호해야할 자원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로 생각해도,
값어치 있는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좋은 무기와 좋은 보호구가 지급됨은 당연하고, 복리 후생도 더 좋아질 수 밖에 없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결국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또, 군의 전반적인 보건복지와 의료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미국의 Surgeon General 수준의 지위와 권한은 갖는 의사-군인이 필요하다.
징병제에 따라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대부분의 남성이 군인으로 복부하는 상황에서 그 보건의료정책은 민간의 정책과 따로 생각할 수 없다.
국가 위기 상황과 같은 비상시 상황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국민 보건의료 정책의 구심점이 이 직책이다.
이는 전문가를 그 분야의 중책에 앉혀야 한다는 주장과 상통하는 부분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제시한 근본적인 해결책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런 해결책을 정부의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낙관적인 시각으로 봐도, 이런 주장들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년 정도는 지나야 한다고 본다.
나를 포함해서 어떤 다른 사람들은 이 땅에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거나, 그 수준의 대격변이 있어야만 가능하리라 본다.
2014/07/14 17:06 2014/07/14 17:06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부끄럽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실의 시대'를 이제야 읽었다. 사실 2010년에 새책으로 구입했고  2011년부터 읽기에 도전했는데, 초중반을 넘어가면 읽기가 어려워져 두 번이나 중단을 했었다. 왜 그랬을까? 문학 서적을 읽을 때는 그런일이 없었기에 아이러니할 뿐이다.

수필집인 '무라카미 라디오'와 단편소설집인 'TV피플'을 제외하면 내가 읽은 하루키의 장편소설은 순서대로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1Q84' 정도로, 그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초라한 수준이다. 세 작품은 떨어져있지만 관련있는 '두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실의 시대는 이 세 작품과는 다르게, 다분히 '연애소설'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는 어느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고 노화를 시작하지만 정신은 육체와 다르게 죽는 순간까지도 성장이 가능한 점처럼, 연애소설이면서도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연애, 사랑 역시도 삶의 한 과정이고 성장의 한 과정이기에 연애소설과 성장소설의 공통분모는 꽤 많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의 삶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요소가 아니던가?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슬픔과 낭만, 결핍과 공허가 공존하는 소설'이라고 하고 싶다.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19세에서 20세로 넘어가는 시간을 위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절은 사랑의 슬픔과 낭만이 공존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성장의 과정'에서 뭔가 '결핍'된 사람들이다. 결국 죽음으로 영원히 함께한 비운의 연인 '기즈키'와 '나오코'에게는 성인에게 필요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용기' 혹은 '자아 성장'이 부족했다. 선배 '나가사와'는 세상을 사랑하는 '포용' 혹은 '너그러움'이 결핍되었고, 그를 사랑했지만 결국 죽음을 선택한 '하쓰미' 역시 '현실감각' 혹은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정상에 가까웠던 '레이코' 역시 비슷한 이유들로 정신병을 앓았다. 그나마 와타나베를 구원할 수 있는 '미도리' 역시도 성장 과정에서 '애정'이 결핍되어 애정에 큰 갈증을 느끼는 여자였다. 상당히 견고하고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 역시도 그 고지식함은 아주 '미세한 균열' 같은 결핍에서 기인했으리라 생각된다.

하루키의 비교적 초기 작품이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이 잘 녹아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다분히 현실 세상인 '도쿄'와 나오코와 레이코가 머물었던 '환상 속 세상' 같은 '아미료'로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하루키의 인기 소설들의 공통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주인공 와타나베의 모습은 하루키의 소설들 속 견고하고 건실한 주인공의 전형이고, 무뚝뚝한 미도리 아버지의 모습 역시 하루키 작품들 속의 전형적인 아버지 모습과 닮아있다. '미도리'로 대변되는 '구원자' 역시도 공통적인 요소이다. 미도리에게 전화하면서 끝나는 장면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음악이 빠질 수 없는데,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비틀즈(the Beatles)'의 곡 'Norwegian Wood'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목의 유래처럼 작가 하루키의 '문화적 취향' 역시도 잘 녹아있어서, 음악과 문학에 관한 그의 사랑이 엿볼 수있다. 그가 사랑하는 음악은 클래식과 째즈 그리고 올드팝 정도로, 그가 존경하는 '스콧 피츠레럴드'로 대변되는 그의 '문학적 취향'처럼 '음악적 취향'도 상당히 미국적이라는 점이 재밌다. 원제 '노르웨이의 숲'은 다분히 '아미료'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이 유럽에서 쓰여졌다기에 그 영향일까도 생각했지만, '노르웨이'가 있는 '북유럽'이 아닌 지중해 연안의 남유럽 국가인 '그리스'와 '이탈리아'란다. 하루키는 그 온화한 날씨 속에서도 '노르웨이의 차가운 숲'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이 소설이 겨우내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작품은 70년대 말 대학생들의 사회 저항 운동인 '동맹 휴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질풍노도처럼 어지러웠던 주인공 와타나베의 '내면 세계'만큼이나 세상도 어지러웠고, 그렇기에 '세상을 보는 가치관'과 직결된 그 결핍들이 더 크게 부각되었을 수도 있겠다. 마침 이미 알고 있는 일본 노래이자, 이 실패한 저항 운동이었던 '동맹 휴학'을 배경으로 하는 노래인 '모리타 도지'의 '우리들의 실패'가 떠올랐다.

역시 매우 재미있고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그만큼 슬프고도 아픈 소설이다. 죽음 역시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껴안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앞으로 내가 겪게될 죽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을 뻔했다. 젊음이란 아름답지만 그만큼 덧없고 슬프다. 의미 없이 허비된 내 지난 젊음 때문이었을까? 나에게는 너무나도 공허하면서도 아리게 다가왔다.

1987년에 발표된 소설이기에 국내에도 다양한 출판사에서 다양한 번역가에 의해 출간되었다. 내가 읽은 '상실의 시대'는 가장 널리 판매되었다고 할 수 있는 '문학사상'의 책으로, 1989년 초판이 출간된 후 2010년에 나온 3판이다. 최근에 나온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가의 '노르웨이의 숲'도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다.
2014/07/14 01:58 2014/07/14 0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