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뮤직의 신예이자 차세대 병기(?) '에피톤 프로젝트'의 앨범 '긴 여행의 시작'.

파스텔뮤직은 2007년 말에 발매된 5주년 기념 앨범 'We will be together'를 통해 'Sentimental Scenery(이하 SS)알렸다면, 2008년에 발매된 컴필레이션 '사랑의 단상'을 통해 'Epitone Project(에피톤 프로젝트 ; 이하 에피톤)'의 합류를 알렸습니다. '사랑의 단상'의 리뷰에서와 마찬가지로 SS와 에피톤을 동시에 언급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두 뮤지션이 바로 파스텔뮤직의 새로운 5년을 이끌어나갈 주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느낌의 피아노와 퍼커션 연주와 시작하는 '긴 여행의 시작'은 제목 그대로 '앨범'이라는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트랙입니다. 도입부가 길어서 연주곡이겠거니 하고 듣다가 보컬이 등장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여행의 준비와 마음가짐을 노래하는 가사는 나름대로 비장합니다. 자, 여행의 준비는 되셨나요?

이 앨범의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을 '눈을 뜨면'은 '토이(유희열)'를 연상시키는 트랙입니다. 거의 모두 '다'로 끝나는 어체는 이별 앞에 담담하려는, '입술 꼭 다문 굳은 의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베어나는 슬픔을 들려주는 감수성은, 감정이 분출하다 못해 과잉하는 2000년대가 아닌, 분명 90년대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뉴웨이브를 연상시키는 사운드와, '차마 뜰 수 없어 꼭 감은 눈'과 '눈물에 젖어가는 베갯잇'은 고등학교 시절 자율학습시간에 몰래 읽었던 연애소설의 향수로 이끕니다.

그리고 '눈'과 '모습'을 통해 이별의 모순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눈을 뜨면 네 모습 사라질까봐
두 번 다시 넬 볼 수 없게 될까봐
희미하게 내 이름 부르는 너의 목소리
끝이 날까 무서워서 나 눈을 계속 감아"

꿈 속에서는 꿈이 깰까 눈을 뜨지 못하고 '너'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그리움에 사무쳤기에 꿈에서라도 나타난 것일까요? 가장 보고 싶은 모습이지만, 그 모습이 사라질까봐 볼 수 없다는 상황의 모순은 어찌해야 할까요? 점점 멀어지는 모습, 언제까지라도 담아두고 싶은 모습이지만, 사라져가는 그 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눈물로 흐려지는 눈을 감아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찌해야할지, 고민에 빠지게 합니다.

'좋았던 순간은 늘 잔인하다'는 연주곡으로 앞선 두 트랙과는 또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면서, 에피톤의 다양한 색깔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이어지는 '그대는 어디에'는 컴필레이션 '사랑의 단상'에 수록되었던,'한희정'의 참여로 더욱 빛나는 트랙입니다. 이별을 고하는 가사

"눈물은 보이지 말길
그저 웃으며 작게 안녕이라고
멋있게 영화처럼 담담히
우리도 그렇게 끝내자"

는 정말 '영화처럼', 영화 '봄날은 간다'를 떠오르게 합니다. 가사는 '눈을 뜨면'과 시리즈물(?) 정도되는 느낌으로 '눈을 뜨면'의 앞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한희정의 목소리는 synth와 어우러져 사랑했던 순간에 대한 회상을 꿈결처럼 그려냅니다.

'봄날, 벚꽃 그리고 너'는 '가장 좋았던 순간'을 한 장의 사진 처럼 들려주는 트랙입니다. 따뜻한 '봄날', 만개(滿開)한 '벚꽃'길을 가장 사랑하는 '너'와 함께 걷는 모습은 아마도 지상의 낙원이겠죠. 하지만, 역시 아마도 추억이라는 앨범 속의 사진 한 장이 되겠지만요. '잡음'은 제목 그대로 잡음으로 시작합니다. 연달아 등장하는 피아노와 비트박스는 '혼돈'을 연상시킵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기억과 감정의 혼돈'이라고 해야할까요?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역시 컴필레이션 '사랑의 단상'을 통해 이미 발표된 트랙입니다. 아른한 타루의 코러스를 듣고 있으면 궁금해집니다. 이 노래의 주인공들은 또 왜 헤어져야 했을까요? 걱정하는 마음, 그 마지막 배려는 정말 배려일까요? 아니면 자신을 위한 위로일까요? '희망고문', '사랑의 단상'에  수록되었던 또 다른 트랙으로,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는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희망은 절망보다 아픔을 생각하게 합니다.

'꿈에 네가 보인다'는 그 세련된 도시적 느낌이 어느 곡보다도 '윤상'을 떠올리게 하는 트랙입니다. 피아노와 synth와 전자음들의 청명한, 감성적 조화는 '뮤지션 에피톤'의 성장 가능성을 기대해보게 합니다. '간격은 허물어졌다'는 피아노 연주만으로 진행되는 뉴에이지풍의 트랙입니다. 이 앨범 수록곡들 중 가장 밝고 희망적인, 한 편의 동화가 생각날 법한 소리를 들려줍니다.

앞선 트랙의 맑은 느낌의 피아노 연주와는 달리 '편린일지라도, 잃어버린 기억'이라는 긴 제목의 연주곡은 무거운 피아노 연주로 시작됩니다. 잃어버린 기억들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고 고독하기만 합니다. 그 여행 끝에 기다리는 것은 과연 어떤 기억들일지요? 마지막 '환절기'는 '간격은 허물어졌다'와 마찬가지로 피아노 연주만 함께합니다. 마지막 트랙답게 느껴지는 평온함, 긴 여행 끝에 결국 마음의 평화를 만날 수 있었을까요? 계절의 변화를 막을 수 없듯, 사람 마음의 변화도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였을까요?

피아노같은 멜로디가 강한 건반악기를 기초로 한 소리와 절제가 담겨있는 서정성의 조화는 분명 요즘의 감수성보다는 '토이'와 '윤상'이 활발히 활동했던 90년대의 감수성을 닮아있습니다. 그리고 90년 대에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그 시절 감수성을 기억하는 저에게는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지만 에피톤은 그 시절의 향수에만 머물지 않고, 에피톤만의 감수성을 구축해 가야할 것입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보는 듯한 앨범 '긴 여행의 시작', 별점은 4.5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