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20대의 비망록... live long and pros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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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그리고하루/from diary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누군가는 헛소리를 하지만,

가까운 일본 출신으로 유럽쪽에서 인정받는 작가들을 보면,
유년기나 청년기의 긴 시간을 유럽에서 보냈더라.

아마도 유럽에서 보낸 긴 시간이 유럽에서 통할 만한,
즉 '전형적인 일본 냄새'가 나지 않는 작품이 나오게한 원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생각은
그저 어떤 국수주의 자의 '뇌내 망상'일 뿐일지도.
그런 망상으로는 대한민국에서 '노벨 문학상'은 영영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

'무라카리 하루키'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스콧 피츠제럴드'이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개츠비'로 익숙한 '스콧 피츠제럴드'의 이름은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도 자주 언급될 정도이고,
하루키의 작품 세계에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영향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어떤 색 꿈을 꾸는가?
한 언어로 또 다른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평생을 홀로였던 어떤 사람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칠 수 있을까?
2014/08/13 13:51 2014/08/1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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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타인의취향/Music&Disc
최근까지 '백인들의 전유물'에 가까운 음악이었던 'Country(컨트리)'는 비교적 그 특징이 뚜렷하다.

특징적으로, '역사상 가장 음반을 많이 판매한 컨트리 가수(약 1억 3천만)'이자 '컨트리 음악의 대부'라고 할 만한 'Garth Brooks' 의 노래들을 들어보면, 주로 '남녀상열지사'를 노래하는 다른 장르에서는 듣기 쉽지 않은, '조국에 대한 사랑(애국)'과 '신에 대한 믿음(신앙)' 그리고 '변치않는 우정'처럼 '고전적인 미덕'들이 노골적으로 녹아있다.

매년 '미국 컨트리 음악의 성지'라고 불리는 Nashville에서 열리는 'CMA(Country Music Awards)'는 미국 그래미 어워드와 더불어 권위있는 음악 시상식이자, 당연히 '백인들의 음악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상식에서 가장 큰 영광은 바로 'Pinnacle Award'라는 상이다. 이 상이 '공로자'에게 수여되는 점은 어찌보면 '공로상'과 비슷하지만, 공로상과는 다르게 '컨트리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에게 그 이름처럼 '정점'에 수여되는데, 매년이 아니라 약 10년에 한 번 정도 수여되는 될 정도로 컨트리 뮤지션들에게는 일'생의 영광'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상이다. 2013년에 컨트리 요정 Taylor Swift가 수상했는데, 바로 전 수상자가 2005년 Garth Brooks였다.

나의 10대 중후반였던 90년대 후반, 인터넷이 걸음마를 때던 시기여서 외국음악을 접할 방법이 많지 않았고, 그 적은 방법들 가운데는 팝음악 잡지 '월간 GMV(지구촌영상음악)'과 홍콩의 'Channel [V]'가 있었다. 매주 토요일 밤 Channel [V]의 빌보드 차트와 월간 GMV의 빌보드 차트, 그래미 어워드 기사, 연간 음반 판매량 정보를 흥미롭게 봤는데,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도 않고 Channel [V]에도 소개되지 않는 가수이면서 매년 음반 판매량 상위권이고 빌보드 차트도 순위권이던 가수가 있었으니 바로 Garth Brooks였다. 지금처럼 'mp3 내려받기(구입)'나 '온라인 스트리밍'은 생각할 수도 없고 '음원의 구입'은 곧 '음반 구입'을 의미하던 90년대 중후반, 발표하는 앨범마다 '1천만장'(거의 대부분 북미에서만)을 팔아치웠고, 다른 장르들의 거센 도전 속에서도 '미국 컨트리 음악'의 명맥을 지켰던, Garth Brooks도 전성기가 지난 2005년이 되서야 수상했는데, 고작 정규 앨범 4장을 발표한 풋내기 Taylor Swift가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Garth Brooks도 넘지 못한 '세계의 벽(세계인의 음악적 취향의 벽)'을 Taylor Swift가 넘어 '컨트리 음악의 세계화'에 공헌했기 때문이리라. (물론 전통 컨트리의 입장에서는 다분히 변질된 컨트리이기는 하겠지만)

미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장 '미국적인 특징'을 버려야하는, 어쩔 수 없는 진화라고 해야할까? Taylor Swift로 대표되는 최근의 '젊은 컨트리'에서는 '애국'이나 '신앙' 같은 고전적인 색채가 사라졌지만, 아직도 젊은 세대 컨트리 음악에도 뚜렷한 공통적 특징들은 남아있다.

high teen romance :

'세계화'되면서 사랑노래가 많아지는 점은 당연한 수순일까? 미국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취업 혹은 학업을 위해 드넓은 미국의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경우도 많은데, 여기서 기인한 특징일까? 아니면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분가하던 과거 '베이비붐 세대'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일까? '10대 시절의 사랑'을 노래하는 곡들이 꽤 있다.

geography :

하나의 표준시대에 모든 국민이 사는 대한민국과는 다르게, 어림잡아 6개 정도의 표준시간대가 존재하는 광활한 국토에 사는 만큼, 도시 각각의 지리환경적 특징이 뚜렷하고 도시들마다 발달과정에 따라서 그 특징이 가지각색이기 때문일까? 비유나 은유의 대상으로 도시나 지명이 자주 사용된다. (예, 바람의 도시 = 시카고)

comparision :

우리와는 다른, 미국의 음악적 혹은 언어적(문학적)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가사에서 비교와 대조가 꽤 많이 사용된다. '연적인 그(그녀)'와 '나'를, 도시/지명 혹은 사물/행동 등으로 다양하게 비교하거나 대조시킨다. 특히 앞서도 언급한 도시나 지명 등으로 비교하는 경우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특징이 녹아있는 Taylor Swift의 곡 'White Horse'로 첫 번째 안내를 마친다.


2014/08/06 16:16 2014/08/0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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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타인의취향/Book
인간은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기원 혹은 조상에 대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류의 기원과 역사'라는 주제는 인간이 고차원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후로 '우주의 기원과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호기심의 영역에 있었다. 두 주제는 모두 20세기까지도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그 기원에 관해 수 많은 '설'이 존재했고 또 그만큼 많은 반론이 존재했다. 하지만 물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천체물리학도 발전하면서 20세기에 우주의 탄생에 관한 '빅뱅 이론'으로 그 기틀은 갖춰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더 많은 부분들이 밝혀져야 하겠지만, '빅뱅 이론'은 이제 우주 탄생에 관한 정론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인류의 기원도 20세기까지 밝혀진 부분은 많았다. 최초의 인류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기원하여 지구 곳곳의 대륙으로 퍼졌다는 이야기는 이제 '빅뱅 이론'만큼 기초 과학 상식이 되었지만, 어떤 경로로 어떻게 거의 전 지구에 퍼졌는지는 20세기 말까지도 의문점으로 남아있었다. 더구나 인간처럼 뛰어난 지능과 적응력으로 지구 곳곳을 이동한 동물은 이전까지 없었고, 인류의 이동은 생존에 필요한 식량 문제를 결정하는 '자연환경의 변화' 뿐만 아니라, 농업과 항해술 같은 기술 발달이나 인간 사이의 갈등(대표적으로 전쟁)에도 영향을 받았기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사료로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자로 기록된 역사'는 최소 수십만 년에 이르는 인류 역사에서 만 년이 채 되지않는다. 그러다가, 모든 동식물에 존재하는 게놈, 유전자(gene), 그리고 DNA가 밝혀지면서 이 기원을 추적하는 강력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20세기 말까지도 기술적인 측면 그리고 비용적인 측면에서 이 단서들을 대규모로 이용하기에는 제한점들이 많았다. 하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2000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완성되면서, 이 단서를 탐구하는 '유전학'의 새 지평이 열렸다.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는 원제 "Deep Ancestry inside the Genograhic Project"처럼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성과들을 바탕으로 염색체와 DNA 단위에서 인류의 기원을 찾아나서는, 거댄한 범지구적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책이다. 저자 '스펜서 웰스'가 집필한 전작 "The Journey of Man : A Genetic Odyssey(2004)", 국내 번역판 '최초의 남자'의 연장선에 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제노그래픽 프로젝트'의 최근 발견 내용을 업데이트하고 동시에 참여를 호소하는 책이다. 모계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mtDNA)'와 부계 유전되는 'Y 염색체'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내용들은, 일반인들도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써놓았으나 생물학이나 유전학의 지식이 전혀 없을 경우에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될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의예과 시절에 배웠던 '유전학' 지식들을 새록새록 되살려냈다.

연구의 최근 발견들은 역시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기원했지만, 그 이동 과정은 예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역시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뤄진 연구여서 그럴까? 아프리카 기원에 관한 내용은, 이 책보다 나중에 출간되었지만 먼저 읽었던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과 교차점이 된다. 그리고 이 인류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복잡하고 방대한 작업은 단순히 유전학적 지식들만으로는 불가능하단다. 인류의 유전학적 발자취를 돌아보는 일은, 실제로 인류가 지구 위에 남긴 흔적들을 탐구하는 '고고학'과 '인류학'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이 재밌다. 생각해보면, 전세계에서 모은 염색체 자료를 바탕으로 실험실에서 발견한고 추론해낸 '유전학적 연대'는 실제 현장에서 알아낸 '고고학적 연대'와 일치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음은 당연하겠다. 실험실의 기초 과학을 벗어난 물리학이 천문학과 만나 천체물리학이 되는 모습과도 비슷한데, 현대의 수 많은 과학기술 학문들은 이제 서로 얽히고설켜서 점점 더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들어지는 상황과도 비슷하다. 최근 범죄 현장에서 남겨진 머리카락이나 신체 일부 속에 있는 DNA로 범인을 알아내는 방법처럼, 이제 조만간 역사학과 인류학의 고증에서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유전학적 검증이 필요한 시대가 열릴 수도 있겠다.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논쟁도 유전학을 통해 종결되는데,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 사피엔스'가 유럽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은 유전적으로 우리의 조상들과는 매우 다른 아종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결국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의 선조가 아닌 셈이다. 인류와의 생존 경쟁에서 뒤쳐져서 멸종했다는데, 정말 적자생존에 의한 자연적인 도태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서론을 시작으로 최근의 연구 내용을 도표와 더불어 업데이트하는 본론, 그리고 연구 참여자, 연구 방법, 연구 윤리, 연구의 한계점과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결론은 꽤나 장황하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한 편의 '연구 논문'을 연상시킨다. 다만 이 연구와 관련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읽기 쉽게 쓰여졌을 뿐이다. 이 연구는 이 책이 발간된 2007년에도 진행 중이었고 2010년에 종료 예정이라는데, 연구의 최후 결론을 알리는 후속 도서는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재밌는 점은 이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제노그래픽 프로젝트 웹사이트(https://genographic.nationalgeographic.com/)를 통해 이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배송비를 제외하고 약 160달러에 구매할 수 있는 'DNA test kit'을 구입하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고 자신의 '유전학적 기원'을 알 수도 있다. 참여는 이 키트를 이용해 '구상상피세포'를 채취해서 다시 돌려보내면 간단하게 가능하다. 160달러를 지불하고 또한 염색체를 제공하여, '제노그래픽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동시에 이 '비영리 프로젝트'를 위한 기부도 하게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참여자 자신을 포함한 인류의 기원을 알아내는 연구에 참여하는 test kit이기에 정식 명칭은 'DNA Acestry Kit'라고 한다. 이 Kit를 소개하는 유튜브 동영상이 2014년 6월에 올라왔고, "Geno 2.0"이라는 주제가 붙은 점으로 볼 때 2010년에 전 단계의 연구를 종결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더 많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계로 나아갔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2010년까지 완성된 인류의 '유전자 계보'를 바탕으로, 참여한 일반인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유전학적 족보'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프로젝트의 입장에서는 윤리적이면서도 재정적으로 안정되게 '유전자 풀(gene pool)'을 늘릴 수 있는 방법으로 나온 Kit라고 생각된다. 어찌보면 인류 모두를 위한 거대한 연구에 참여하는 '킥스타터'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2014/08/05 01:30 2014/08/05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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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개봉했던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의 후속편이 '마블(Marverl) 히어로' 라인업이 빠져있는 7월을 틈타 개봉했습니다. 전작은 아주 오랜만에 갔었던 종로 '서울극장'에 보았기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리부트는 총 3부작으로 기획되었다는데, 꽤 성공적인 리부트로 평가받은 전작 덕분에 제작이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혹성탈출'이라는, 국내에 수입되면서 원작의 제목과는 전혀 다른 이 제목을 처음 붙인 사람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제목은 오리지널 시리즈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2001년 '팀 버튼' 감독의 리메이크 작품까지는 한국판 제목 '혹성탈출'이 유효했지만, 이제는 '혹성' 이나 '탈출'과는 전혀 관련이 없기에 너무나 엉뚱할 따름입니다.
 
전작에 이어 주인공 '시저'를 연기한 '앤디 서키스'는 이제 "반지의 제왕"과 "호빗", 중간계 시리즈의 '골룸'과 영화 "킹콩" 속 '킹콩'으로 '괴수 전문 배우' 혹은 '모션 캡쳐의 대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영화보다도 '앤디 서키스, 그를 위한 영화'라고 하겠습니다. 수 많은 유인원들이 등장하는 만큼 어떤 영화보다 그의 '모션 캡쳐'의 비중이 클 뿐만 아니라, 유인원 '시저'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인 만큼 풍부해진 표정과 내면 연기까지 모션 갭쳐에 관한 그의 연륜과 내공이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쌓아온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인류 수준의 문명을 이뤘던 오리지널 시리즈의 유인원들과는 다르게,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 무리는 수렵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부족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영특했던 시저와는 다르게 다른 유인원들의 지능은 인간을 뛰어넘었다고 보이지는 않고, 전작으로부터 약 10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에 이룬 수준은 '현실성'을 부여합니다. 더구나 전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인간들에게 환멸을 느꼈던 시저가 유인원 무리를 이끌고 산속으로 은둔한 모습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바이러스에도 소수가 살아남은 인류와 다시 조우하게 되고 갈등은 시작됩니다.

인류와 평화를 지키려는 온건파 '시저'와 전쟁을 통해 인류 멸종을 주장하는 '코바'의 대립은 미국의 남북전쟁(Civil War)를 연상시킵니다. 더구나 시저가 그의 이름(Caesar)처럼 심복 코바에게 배신 당하는 모습은, 결국 유인원들도 인간과 다르지 않고 '인류의 역사'를 반복하리라고 예상하게 합니다. 코바의 반란을 수습했지만, 이제 시작된 전쟁은 멈출 수 없다는 시저의 마지막 대사는 3부작의 마지막을 기대하게 합니다. 그리고, 유인원들의 지도자로 복귀하여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시저를 뒤로하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착한 사람 '말콤'의 모습은, 새로운 지구의 지배자로 떠오르는 유인원과 역사의 뒤로 사라지는 인류를 대비시키는 듯하여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별점은 4개입니다.
2014/08/02 20:22 2014/08/0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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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을 시작하면서 '홍대 죽돌이 생활'을 청산한 나오게는 그때부터 작년까지 새로운 음악을 접할 방법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나, 유튜브, 혹은 온라인샵을 통한 음반구매 정도였다. 하지만 가히 '정보의 바다'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에서 새롭고 취향을 만족하는 음악을 찾기는 쉽지 않아서, 듣거나 구입하는 음원과 음반의 절반 이상은 기존에 들었던 뮤지션이나 밴드의 후속 앨범이나 꽤 연관성이 강한(같은 레이블이라거나, 탈퇴/해체 후 만든 앨범이라거나) 음악들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오랜만에 찾은 음악 페스티벌인 "안산 벨리 록 페스티벌"은 음악적 견문을 넓혀주는 꽤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내 '음악감상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까? 온라인만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세계 음악 시장의 트렌드와 레전드에 대한 예우, 그리고 페스티벌 문화까지 "페스티벌의 매력"를 발견한 점은 큰 수확이었다.

사실 수 년동안 홍대 라이브클럽 공연을 봐왔던 입장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각종 페스티벌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물론 음악팬의 입장에서야 티켓 하나로 2~3일동안 평소 보고 힘들었던 수 많은 밴드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지만, 페스티벌이 많아지면서 홍대 클럽들과 '밥그릇 싸움'처럼 되어가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약간의 비약을 더해서 '현재의 의료 시장'에 비유하자면, '소규모 의원들(=홍대 라이브클럽들)'과 '대형 병원들(=각종 페스티벌)'이 경쟁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클럽들이 동네 의원들처럼 '적당한 진료비에 각각의 전문 분야의 질환을 하나씩 치료해주는 격'이라면, 페스티벌은 거의 모든 전문과을 진료하는 대형 병원이면서 의료 시장과는 다르게 '(다른 의미의 '포괄수가제'로서) 몇 배 비싼 진료비에 일괄적으로 모든 질환을 치료해주는 상황'이라는 할 수 있다. 페스티벌이 많아지면 (금전적 이유 및 접근성 등에 의해) 아무래도 클럽 쪽의 인구가 페스티벌로 빠져나갈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의료시장'과는 다르게 '라이브클럽 문화'는 (클럽과 페스티벌에서 공통적으로 소비되는) '인디음악'를 지탱하는 밑거름으로, 스포츠의 '유소년 시스템'에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밥그릇 싸움이 지속되면 결국 '인디음악'의 기반인 라이브클럽이 흔들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음악시장 전체에는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마치 '유럽 축구'에서 유소년 시스템이 약한 리그는 경쟁에서 도태되는 상황한 비슷한데, 유럽 통합으로 국경이 희미한 유럽 축구에서는 '자본력'으로 어느 정도 만회가 가능하지만, 경계가 '대한민국'으로 명확하게 한정적이고 그 기반도 튼튼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본력이 아무리 커봐야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물론 자금력에 따라 섭외하는 해외 뮤지션들의 (개런티와 비례하는) 인지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외의 라인업을 채우는 국내 뮤지션들은 사실 '돌려쓰기(혹은 돌려막기)'로 여러 페스티벌에 겹치기 출연이 허다한 상황이다.

페스티벌이 많아지면서 페스티벌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치열해졌고, 작년이 그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여름 페스티벌들의 경쟁이 뜨거웠는데, '펜타포트'에서 분리되었던 '지산 밸리'가 다시 '안산 밸리'와 '지산 월드'로 분리되어, 세 페스티벌이 라인업 경쟁을 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올해는 그 휴유증으로 슬그머니 '안산 밸리'와 '지산 월드'가 취소되면서 '공멸' 양상을 보여줬다. 어쩌면, 부지 마련부터 막대한 홍비 비용까지 '과도한 몸집 부풀리기'와 개런티만 천정부지로 올리는 ('제로섬 게임'에 가까운) 라인업 경쟁까지, '치졸한 밥그릇 싸움'의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올해 7월의 '홍성 리듬 앤 바비큐 페스티벌'는 '지속 가능한 페스티벌'의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원래 작년에 가평의 자라섬에서 열렸던 페스티벌을 홍성으로 옮겨왔는데, 지역 축제와 결합하여 '음악 페스티벌'의 또 다른 대안으로 보였다. 홍성의 특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소고기/돼지고기'를 홍보하기 위한 '축제'이자 음악을 즐기는 '페스티벌'로서, '소통'과 '실속'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모습이다. 우선 지역 축제로서 지자체와 협력하여 기존 시설인 '대학교 인조잔디 구장'을 부지로 사용하여 비용을 절약하면서도 편안한 관람을 위한 실속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3일의 축제 기간 동안, 하루의 라인업을 한 레이블에 온전히 할당하면서 (다른 페스티벌과 비교했을 때) 섭외 개런티도 상당히 절감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비용 절감은 '(예매 기준으로) 1일권 2만원'이라는 저렴한 티켓 가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음악성을 인정받은 레이블들을 섭외해서 '음악 페스티벌'로서의 '안정성'과 부담없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실속'을 모두 잡았다고 하겠다. 참여 레이블 입장에서도 '레이블 콘서트'를 겸하는 '레이블 홍보'의 무대로서 꽤 괜찮은 페스티벌이 아니었을까?

다만, 서울에서는 조금 먼 '충남 홍성'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홍보가 부족했을까? 꽤 괜찮은 라인업과 저렴한 티켓 가격을 생각한다면 관람객이 많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역 축제와 결합한 페스티벌의 첫 걸음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펜타포트와 안산 밸리의 '진흙탕'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인조잔디 구장'은 음악 페스티벌을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교통/숙박 및 기타 부대 시설을 확충하고, 라인업을 늘려서 오후 3~4시나 되어야 시작했던 공연을 조금 더 당긴다면 더욱 알찬 페스티벌이 되리라 기대해본다.
2014/07/29 01:49 2014/07/29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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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타인의취향/etc.
GOP 총기 난사 사고 이후 재발을 위한 방지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모두 헛소리로 보인다.
그저 희생양을 찾고 있을 뿐이다.
군대 총기 난사 사건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마 5년 후, 10년 후에도 반복되리라.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병 임금의 현실화 뿐이다.
공식적인 휴가를 빼면 사실상 24시간 근무라고 볼 수 있는 현재의 징병제에서,
식비, 의복비 등은 국가에서 제공하니
하루 8시간씩 잡고 30일을 곱해서 240시간 정도의 월급은 시간당 최저임금 이상으로 지급해야 정상 아닐까?
적절한 보상이 없는 의무는 애국심을 가장한 착취일 뿐이다.

분명 지금 군에는 첨단 과학 기술로 대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하지 않고 있다.
왜냐면 한달에 10만원 수준의 사병 월급은 그런 첨단 장비들을 도입하고, 유지보수하는 비용에 비교한다면 0에 가깝기 때문이다.
노동의 가치가 0에 수렴한다면, 사병은 소모품이 된다.
식당에서 그릇 세척을 모두 '식기 세척기'에 의존할 수도 있겠지만,
비용-효율적인 면에서 최저임금이 저렴하기에 인력을 사용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정상 수준의 임금이라면, 사병의 가치는 더 이상 소모품이 아닌 보호해야할 자원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로 생각해도,
값어치 있는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좋은 무기와 좋은 보호구가 지급됨은 당연하고, 복리 후생도 더 좋아질 수 밖에 없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결국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또, 군의 전반적인 보건복지와 의료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미국의 Surgeon General 수준의 지위와 권한은 갖는 의사-군인이 필요하다.
징병제에 따라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대부분의 남성이 군인으로 복부하는 상황에서 그 보건의료정책은 민간의 정책과 따로 생각할 수 없다.
국가 위기 상황과 같은 비상시 상황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국민 보건의료 정책의 구심점이 이 직책이다.
이는 전문가를 그 분야의 중책에 앉혀야 한다는 주장과 상통하는 부분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제시한 근본적인 해결책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런 해결책을 정부의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낙관적인 시각으로 봐도, 이런 주장들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년 정도는 지나야 한다고 본다.
나를 포함해서 어떤 다른 사람들은 이 땅에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거나, 그 수준의 대격변이 있어야만 가능하리라 본다.
2014/07/14 17:06 2014/07/1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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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실의 시대'를 이제야 읽었다. 사실 2010년에 새책으로 구입했고  2011년부터 읽기에 도전했는데, 초중반을 넘어가면 읽기가 어려워져 두 번이나 중단을 했었다. 왜 그랬을까? 문학 서적을 읽을 때는 그런일이 없었기에 아이러니할 뿐이다.

수필집인 '무라카미 라디오'와 단편소설집인 'TV피플'을 제외하면 내가 읽은 하루키의 장편소설은 순서대로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1Q84' 정도로, 그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초라한 수준이다. 세 작품은 떨어져있지만 관련있는 '두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실의 시대는 이 세 작품과는 다르게, 다분히 '연애소설'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는 어느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고 노화를 시작하지만 정신은 육체와 다르게 죽는 순간까지도 성장이 가능한 점처럼, 연애소설이면서도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연애, 사랑 역시도 삶의 한 과정이고 성장의 한 과정이기에 연애소설과 성장소설의 공통분모는 꽤 많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의 삶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요소가 아니던가?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슬픔과 낭만, 결핍과 공허가 공존하는 소설'이라고 하고 싶다.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19세에서 20세로 넘어가는 시간을 위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절은 사랑의 슬픔과 낭만이 공존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성장의 과정'에서 뭔가 '결핍'된 사람들이다. 결국 죽음으로 영원히 함께한 비운의 연인 '기즈키'와 '나오코'에게는 성인에게 필요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용기' 혹은 '자아 성장'이 부족했다. 선배 '나가사와'는 세상을 사랑하는 '포용' 혹은 '너그러움'이 결핍되었고, 그를 사랑했지만 결국 죽음을 선택한 '하쓰미' 역시 '현실감각' 혹은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정상에 가까웠던 '레이코' 역시 비슷한 이유들로 정신병을 앓았다. 그나마 와타나베를 구원할 수 있는 '미도리' 역시도 성장 과정에서 '애정'이 결핍되어 애정에 큰 갈증을 느끼는 여자였다. 상당히 견고하고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 역시도 그 고지식함은 아주 '미세한 균열' 같은 결핍에서 기인했으리라 생각된다.

하루키의 비교적 초기 작품이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이 잘 녹아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다분히 현실 세상인 '도쿄'와 나오코와 레이코가 머물었던 '환상 속 세상' 같은 '아미료'로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하루키의 인기 소설들의 공통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주인공 와타나베의 모습은 하루키의 소설들 속 견고하고 건실한 주인공의 전형이고, 무뚝뚝한 미도리 아버지의 모습 역시 하루키 작품들 속의 전형적인 아버지 모습과 닮아있다. '미도리'로 대변되는 '구원자' 역시도 공통적인 요소이다. 미도리에게 전화하면서 끝나는 장면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음악이 빠질 수 없는데,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비틀즈(the Beatles)'의 곡 'Norwegian Wood'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목의 유래처럼 작가 하루키의 '문화적 취향' 역시도 잘 녹아있어서, 음악과 문학에 관한 그의 사랑이 엿볼 수있다. 그가 사랑하는 음악은 클래식과 째즈 그리고 올드팝 정도로, 그가 존경하는 '스콧 피츠레럴드'로 대변되는 그의 '문학적 취향'처럼 '음악적 취향'도 상당히 미국적이라는 점이 재밌다. 원제 '노르웨이의 숲'은 다분히 '아미료'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이 유럽에서 쓰여졌다기에 그 영향일까도 생각했지만, '노르웨이'가 있는 '북유럽'이 아닌 지중해 연안의 남유럽 국가인 '그리스'와 '이탈리아'란다. 하루키는 그 온화한 날씨 속에서도 '노르웨이의 차가운 숲'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이 소설이 겨우내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작품은 70년대 말 대학생들의 사회 저항 운동인 '동맹 휴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질풍노도처럼 어지러웠던 주인공 와타나베의 '내면 세계'만큼이나 세상도 어지러웠고, 그렇기에 '세상을 보는 가치관'과 직결된 그 결핍들이 더 크게 부각되었을 수도 있겠다. 마침 이미 알고 있는 일본 노래이자, 이 실패한 저항 운동이었던 '동맹 휴학'을 배경으로 하는 노래인 '모리타 도지'의 '우리들의 실패'가 떠올랐다.

역시 매우 재미있고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그만큼 슬프고도 아픈 소설이다. 죽음 역시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껴안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앞으로 내가 겪게될 죽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을 뻔했다. 젊음이란 아름답지만 그만큼 덧없고 슬프다. 의미 없이 허비된 내 지난 젊음 때문이었을까? 나에게는 너무나도 공허하면서도 아리게 다가왔다.

1987년에 발표된 소설이기에 국내에도 다양한 출판사에서 다양한 번역가에 의해 출간되었다. 내가 읽은 '상실의 시대'는 가장 널리 판매되었다고 할 수 있는 '문학사상'의 책으로, 1989년 초판이 출간된 후 2010년에 나온 3판이다. 최근에 나온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가의 '노르웨이의 숲'도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다.
2014/07/14 01:58 2014/07/14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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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분석적이지만 한의학처럼 통합적이지 못하다.

의학은 인간을 기계로, 장기를 그 부속품으로 보고 치료하지만,

한의학은 인간을 유기체로 보고 인체의 모든 장기를 통합적으로 고찰하여 치료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의학과 한의학을 구분해서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

의학도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 한의학처럼 경험 중심의 의학이었고,

그야말로 다듬에 지지 않은 학문이었을 게다.

음양오행, 사상의학...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주장한 '4대 원소설'과 뭐가 다를까?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의학도 한의학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분명 미개하고 미신적인 요소도 많은 학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경험에 이론과 실험을 통한 검증이 합쳐지면서 끊임없이 발전했고, 그 진보는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수백년전 저서에 기댄 한의학이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라면,

끊임없이 나아가는 의학은 아직도 진화를 멈추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다.

아직도 현생인류를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구분하는 사람이 있을까?

의학과 한의학의 관계도 그렇다.

...

의학이라고 신이 내려줬다거나 외계인이 던져준 외계문명에서 기원한 학문이 아니다.

그 근본은 결국 인류의 경험과 노력의 결정체이다.

시대의 변화와 필요에 얼마나 적응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가 그 차이를 만들었을 뿐이다.
2014/07/09 23:37 2014/07/09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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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에서 도서/영화/TV시리즈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현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포스트묵시록(postapocalypse)'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좀비물'의 인기인데, 1950년대 소설을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비롯한 '좀비 영화'는 역시 최근 소설을 각색한 영화 '월드워Z'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TV시리즈로는 '워킹 데드'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2007년 미국에서 출간되고, 2008년에 국내에도 소개된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도 일면에서는 그런 '종말적 재앙 뒤의 세상'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과 대중문화적 현상에 궤를 같이하는 책이라고 할 수있겠다. 하지만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흥미 위주로 쓰여진 소설이나 영화들과는 다르게,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정교한 과학적 예측이 첨가된 논픽션이다. 작가는 고고학, 생물학, 화학, 해양학, 토목건축학 등 과학의 각 분야들(그리고 그 세부 분야들)의 전문가들과의 협조로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등지를 돌며 인간이 없었던 과거와 인간의 등장 이후, 그리고 인간이 사라진 후의 세상까지 다각도로 조명한다.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서 '스미스 요원'은 '네오'에게 '인간은 바이러스와 같다'고 말한다. 지구와 대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숙주에 침투하여 숙주를 이용하고 결국에는 파멸로 몰아가는 지독한 '바이러스'처럼, 인류도 '지구'와 '대자연'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면서 그 혜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구와 대자연을 파괴하고 결국에는 인류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인류가 유인원에서 벗어나 도구를 사용하고 문명을 개척해나간 역사는 '파괴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 속에서도 '수렵 생활 동안 자행된 인류의 (전격전에 비유되는) 대학살과 그로 인한 대형 포유류의 멸종 가능성'과 '농경 생활에 따라 자행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숲과 목초지의 대파괴'를 언급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화석 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한 최근 2세기 동안에는 그 파괴가 더욱 가속되었고, 인류 등장 이후 어느 순간보다 더 많은 생물종이 멸종되고 있다.

결국에는 '자연과의 조화와 자연 보호'의 메시지를 던질 수 밖에 없는 책이지만, 그 이상의 지식을 전달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아직도 코끼리나 코풀소, 하마와 같은 대형 포유류들이 건재하는 아프리카 대륙과는 다르게, 현재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형 포유류가 서식하지 않는 이유는 꽤나 충격적이다. 상당히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아메리카로 건너간 인류의 '전격전에 가까운 대량 학살'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인간의 본성은 본래 (역시 다분히 인간 중심의 가치 판단이기는 하지만) 바이러스처럼 '악하고 파괴적'이라는 생각을 들게한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친환경 플라스틱' 혹은 '광분해 플라스틱'이라고 알고 있는 플라스틱들도 자연에서 완전히 분자 수준까지 분해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게 분해되지만, 현미경으로는 보이는 수준이어서 결국 바다의 미생물들이나 작은 생물들에게 먹이로 오인되어 흡수되고 먹이 사슬을 따라 상위 포식자로 갈 수록 농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상당히 께름칙할 따름이다.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와 희망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비교적 중립적이다. 우리 인간이 없어지면, 인류가 길들였던 몇 종의 동물과 식물들을 제외하면, 아프리카 세렝게티를 비롯해 여러 대륙 곳곳에 아직 상처 없이 남아있는 산과 숲과 들에서 동식물들이 처져서 대부분은 (감정이 있다면 아마도 기쁘게) 다시 번성하리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인류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가까운 바다에도 회복의 희망은 남아있다고 한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지만, 분명 '세상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성경을 기초으로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비꼬는 의도도 엿보인다. 하루 아침에 인간이 모두 사라지거나 갑자기 대부분의 생물종들이 멸종하지는 않겠지만, 저자가 소개하는 멸종을 늦추고 조화로 나아가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역시 기독교적 세계관 만큼이나 극단적이다. 결국 지구를 소모하는 인간의 수를 줄여야하고, 그 수를 줄여나가는 현실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은 '출산 제한'이다. 한국의 성공적인 '산아 제한 정책'이 떠오르는 부분이기도 한데, 엄마 한 명에 아이 하나로 제한한다면 21세기의 끝자락에는 현재 60억이 넘는 인류를 그 절반 정도까지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확실하지만 쉽지 않은 방법이다. 다행히도 산업화된 많은 나라들에서 출산율이 과거에 비해 떨어지는 추세를 보이는 점은 희망적이다. 하지만 역시 아직도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

과연 그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이라는 부하를 지구와 대자연이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인류가 22세기와 23세기, 그리고 더 먼 미래의 시간들을 지구에서 보낼 수 있을까? 결국 화석으로만 기억되는 공룡처럼 되지는 않을까? 인류도 아직까지는 '지구'라는 단 하나의 행성에 의존하는 종족이기에, 소행성 충돌이나 빙하기 같은 자연 재해에는 당해낼 수 없겠지만, 인류의 '멸종 원인'이 어리석게도 '우리 자신'이 아니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바로 지금이 지구와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을 위한 작은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전문적으로 공부하거나 전문 서적을 읽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고고학/인류학적 사실과 미국과 미국의 대도시들의 자연사, 그리고 최근 인류가 이뤄낸 다방면에서의 과학적 성취까지 전달해주는 점은 흥미롭다. 다만, 꽤 길게 늘어지는 문장들에서 부자연스럽고 매끄럽지 못한 번역은 아쉽다.
2014/07/07 00:48 2014/07/07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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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미나 참석차 방문한 서울 '국립재활원'.

지난 방문 때, 견문을 넓혀주었던 곳.

꽤 오랜만인데, 아마도 약 4년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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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전문병원답게 휠체어 이용자를 배려한, 낮은 세면대와 아래로 기울어진 거울.

어쩌면 '배려'는 아주 먼 곳에 있지 않다. 아주 작은 생각의 변화로도 이런 배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이제 다른 재활병원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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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롯한 많은 재활의학과 의사들이 부러워할 만한 점은 바로 이것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지어지는 긴 '램프', 휠체어 체험 뿐만 아니라 보행 훈련에도 충분한 '체험관'.

'국립재활원'이 '국내 최고'의 재활병원은 아니더라도 '모범'은 될 수 있도록 하는 요소들.

하지만 재활의학과 의사로서, '모범'이 아닌 '표본'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슬프다.

부족하고 부실한 정부의 장애인 복지 정책과 터무니 없는 건보공단의 '저수가'로는 꿈도 꿀 수 없는 현실.

교과서적인 '모범'을 그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표본'으로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현실.

어쩌면 이 나라의 노인과 장애인 복지에 대한 기본 모토는 '늙고 병들었으면 죽어야지'일지도.

침몰해가는 '대한민국 의료號(호)'에 탈출구는 없어보인다.
2014/06/27 06:10 2014/06/27 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