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지 히토나리 - 백불 (白佛)

원래 '백불'은 '언젠가 함께 파리에 가자'보다 먼저 읽으려 했던 책이다. 역시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으로, 일본에서는 1997년에 발표되었고 우리나라에는 2011년이 되어서야 출간된 소설이다. 처음 '하얀 부처'를 의미하는 '백불'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는, '백인 승려가 성불을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어리석은 예상이었지만.

요약하자면 강 하구의 작은 섬 '오오노지마'에서 태어났고 그 곳에서 숨을 거둔 '에구치 미노루'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이다. 한 인간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일반적인 성장 소설과 차별점은 청년이 되면 멈추는 '육체적 성장'보다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정신적 성장'을 밀도있게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주인공 에구치 미노루와 그의 가족, 친구들이 겪는 삶과 죽음을 그리면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겪에 되는 죽음에 대해 진지한 성찰로 풀어나간다. 그 이야기들 사이에는 '오토와'와 '누에'에로 표현되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 어린시절의 '기시감'으로 시작되어 딸 '린코'을 통해 밝혀지는 '영혼과 전생' 등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보았을 인생과 그 종착역인 죽음에 대한 '질문과 답변'들이 이어진다. 

탄생과 함께하는 피할 수 없는 죽음, 그리고 죽음의 의미와 죽음 뒤의 세계 등, '죽음'이란 나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사후 세계와 전생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서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기에 기억할 수 있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본 사람이라면 더욱 빠져들만한 주제들이 주인공 미노루의 인생과 사색을 통해 진행된다. 이 작품 하나로 답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 미노루와 친구 기요미가 작품 속에서 대화와 행동으로 보여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큰 감명을 받았다.

300쪽이 넘는 짧지 않은 분량에 상당히 많은 야이기와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지만, 물 흐르듯 흘러가는 문장으로 흡입력을 발휘하는 건 작가 '츠지 히토나리'의 특기라고 해야겠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지만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무게를 잡지도 않는다. 일본 작가들에게 종종 느껴지는 사무라이의 '가면 달린 투구'나 게이샤의 '짙은 화장'이 느껴지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정갈하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젊은 시절부터 유럽을 방랑하였기 때문에, 그의 실제 인생처럼 그의 글 속에서도 그런 자유분방한 기질이 엿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에구치 미노루'는 작가의 외조부가 모델이라고 한다. 그의 외조부는 작품 속 주인공처럼 실제로 대장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전쟁 중에는 철포 개발에 종사했고, 발명가가 되었다고 한다. 작품과 다른 점은 작가의 외조부는 전쟁의 부조리와 잘못을 깨닳고 승려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뼈로 만들어진 '백불'도 실제로 승려가 된 그의 외조부가 건립하여, 지금도 오오노지마에 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미노루의 딸 린코가 문필가와 결혼했다는 대목에서 '백불이 실제로 있다면 작가의 집안 조상의 이야기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었다. 실제 역사에 작가의 상상력과 문장이 더해져 완성된 '백불'은 작가의 초기작이지만, 그의 작가 인생에서 '걸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 실제로 '프랑스 5대 문학상' 가운데 '페미나상'을 일본 작가 최초로 수상했다고 한다. 동양적 선(禪)이 녹아있는 이 작품은 프랑스인들에게 신비롭게 다가갔을 법도 하다.

소설 말미에 주인공 '미노루'가 계획한 골불을 실제의 형태로 제작하는 조각가 '이하라 하치헤이'는 작가 자신이 투영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노루와 섬사람들의 뼈가루로 그들의 생사에 대한 염원이 담긴 골불을 완성한 소설 속 '이하라 하치헤이'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로 삶을 뛰어넘는 '불멸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작가로서의 염원과 포부가 전해졌다. 더불어 조각가 하치헤이가 골불을 완성하고 프랑스로 떠난다는 부분에서는 작가의 '프랑스에 대한 애착'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프랑스에 대한 이해와 애착이 그를 프랑스에서 사랑받는 작가로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1989년에 데뷔한 작가의 1997년 작품이니 작가 인생에서는 '초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2011년이나 되어서 번역된 점도 아쉽지만 이 작품 다음으로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지 않는 점은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2014/04/08 18:28 2014/04/08 18:28

츠지 히토나리 - 언젠가 함께 파리에 가자

'언젠가 함께 파리에 가자'


참 낭만적인 제목이다. 오래전에 사두고 이제서야 읽었지만, 아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도 이 제목에 끌려서 샀을 게다. 프랑스는 커녕 유럽도 가본 적이 없지만, 문화와 예술이 살아 있는 낭만의 도시 '파리(Paris)'라는 이름이 부사 '함께'와 만나니 그리도 낭만적이면서도 애틋하게 들리는 이유는 왜일까? '언젠가'는 모호한 시간을 의미하는 부사로 허언처럼 들리게 할 수도 있지만, '가자'라는 힘있는 동사와 만나니 언젠가는 꼭 이뤄질 법한 약속처럼 들린다.

일본 작가 '츠지 히토나리'는 우리나라에 많은 책이 소개되지 않았지만, 작가이자 영화 감독이자 뮤지션으로 예술에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로 국내에도 이름이 알려졌고,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책은 많지 않지만 몇몇 소설들을 꽤 재밌게 읽은 기억도 있기에, 이 책도 집어 들었다.(그런데 사실은 온라인으로 샀다.)

이 책의 일본어판은 2005년에 출간되었는데, 약 1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파리에서 살면서 취재하고 쓴 책이라고 한다. 2003~2005년이 될테니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파리 생활'을 담은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책을 여행자들이 목적지로 떠나기 전에 읽는 '가이드 북'이 아니라 '라이브 북'이라고 한다. '가이드 북'들은 유명하거나, 꼭 가봐야 하거나, 가볼 만한 곳들을 모아서 '백화점'식으로 소개하곤 하는데, 이 책은 그런 가이드 북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 이 책은 '파리 여행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파리에 거주할 예정'인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가이드 북처럼 관광지를 떠먹여 주는 책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파리에서 살아가는 요령과 마음가짐 등을 알려주는 책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잡은 물고기를 주지 않고 낚시할 때 요령이나 마음가짐 정도를 알려주는 책이랄까?

그렇고다 여행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은 아니다. 미식가가 유난히 많아 보이는 일본답게, 그도 나름 미식가로서 여러 음식점들을 추천하고 있다. 몇 년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음식점을 평가하는 유명한 기준인 '미슐렝 가이드'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미슐렝 가이드'는 이름처럼 프랑스의 타이어 회사 '미슐렝(Michelin)'이 조사하고 발간한 책으로 최대 3개로서 음식점을 평가하는데, 프랑스에서도 꽤 중요한 음식점 판단 물론 입맛이라는 감각이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도 크게 작용해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파리에는 미슐렝 가이드에서 별이 3개에서 2개로 떨어져서 자살한 쉐프가 있을 정도로 쉐프들에게는 자존심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오픈한 유명한 쉐프 '피에르 가니에르'도 언급되니다. 그렇지만 미슐렝 가이드의 별점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가 찾아낸 잘 알려지지 않은 맛집도 소개하고 있다.  다만 이 책에 나온 음식점 이름들은 약 10년 전의 정보라서 지금도 유효할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만의 맛집을 찾아내는 요령도 놓지지 않고 있는 책이기에 파리에 오래 머무른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먹는 이야기가 분명히 많지만, 프랑스의 기나긴 '바캉스', 파리에서의 '운전', 다정한 인사 '비주', 일본과는 다른 아내의 '출산' 등 거주자가 아닌 여행자라면 알 수 없을 이야기들도 담고 있어서 '파리에서의 삶'을 여러 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점도 이 책의 매력이다.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문화적으로더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은 한국와 일본이기에 일본인이 파리에 살면서 겪었을 곤란을 한국인으로서 공감할 부분들이 많았다. '인구 고령화', '저출산', '독신 가구'의 증가 등 여러 사회 현상에서 우리보다 수 년에서 십수 년을 먼저 겪은 일본을 따라가고 있는 한국이기에, 이런 현상들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이나 대처는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본보다도 더 빠르게 그런 현상들을 겪은 프랑스를 일본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점도 흥미롭다. 과거 유럽 최저 출산 국가였던 '프랑스'는 약 10년 전부터 늦은 출산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지금은 유럽에서 출산율이 높은 국가라고 하는데, 이 책에도 그론 늦은 출산이 유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프랑스, 그리고 파리.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주의 기원이 되었고 수 많은 예술가들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예술이 살아 숨쉬는' 도시답게 '자유와 낭만의 도시'라고 불린다. '경제 지표'만을 강조하고 국민들에게 세뇌시키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확실히 다른 풍경들이다. 시민 의식 수준 또한 굉장히 높다고 하는데, 그런 의식 수준의 바탕이 된 역사적 유산과 문화적 배경은 부러울 따름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한국을 벗어난 '낯선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파리'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그렇게 해보고 싶어졌다.

2014/04/03 22:44 2014/04/03 22:44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Captain America : the Winter Soldier) - 2014. 3. 29.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의 첫 번째 페이즈(phase)를 화려하게 장식한 '어벤져스(the Avengers)'의 영웅들 가운데 '캡틴 아메리카'는 확실히 독특한 위치에 있는 영웅입니다. '반신반인'인 데미갓(Demigod)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고뇌하는 '토르'나, 명석한 두뇌와 엄청난 재산 물려받은 '엄친아'로 태어나 양심적인 이성과 본능적인 명예욕이 뒤엉킨 '아이언맨', 그리고 역시 뛰어난 과학자로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이성'과 '파괴적인 동물적 본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헐크'과 비교해보면, '캡틴 아메리카'는 상당히 평면적인 인물에 가까워 보입니다. 능력 면에서도, 대단한 과학자인 '토니 스타크'와 '브루스 배너'와 비교하면 지적 능력은 일반인 수준이고, '반신반인 토르'나 '태양계 최고의 근육, 헐크'에 비교하면 육체적 능력도 현실에도 존재하는 '조금 강한 지구인 수준' 정도로 평범해 보입니다. 만화 '드래곤볼'의 지구인 최강 '크리링'정도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힘들이 난무하는 히어로 무비 '어벤져스'에서 그는 다른 의미로 '밸런스'를 파괴하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처럼 그가 상징는 '냉철한 정의'와 '뜨거운 애국심'은 현대사회에서 다소 흐릿해진 '고전적 가치'들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애국심은 아직도 유효한 가치들이자 인류를 위헙하는 위기 상황들에서 더욱 빛나는 가치들이기에, '공통의 위험'에 대항하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한 어벤져스를 묶는 구심점으로서 '캡틴'인 그의 묵직함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의 현실적인 능력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원작 마블 코믹스의 온 우주를 넘어 평행 우주까지 확장되는 '마블 유니버스'와는 다르게, 기술적인 측면에서 영상으로 적절히 표현가능하고 원작 코믹스를 모르는 일반 영화 관객들도 이해가 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는 '안전장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작 '캡틴 아메리카 : 퍼스트 어벤져(Captain America : the First Avenger)'는 부제처럼 '어벤져스'의 예고편 정도로 보일 만큼 아쉬움이 컸습니다. '토르 : 천둥의 신(Thor)'도 마찬가지여서, 두 영화는 '어벤져스' 결성을 위해 급조된 느낌이 다분했습니다. 그래서 두 영웅의 후속편들은 '어벤저스'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가면서도, 각자의 스토리 라인을 이끌어가는 점이 중요했으리라 봅니다. 더구나 군인 출신인 '캡틴 아메리카'는 '쉴드(S.H.I.E.L.D)'의 요원으로 그 연결끈을 놓을 수 없는 존재이고, '어벤져스' 이후에도 개별적인 영화로 소개되지 않는 '쉴드'의 '국장 닉 퓨리'와 '블랙 위도우' 등의 요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기에, 영화 속에서 '쉴드'라는 조직이 차지하는 비중도 고려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조 루소'와 '안토니 루소' 형제가 감독한 '캡틴 아메리카'의 두 번 째 극장판 영화는 '어벤져스의 예고편으로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단독 영화로서는 실망스러웠던' 전작의 그림자를 지워내는 멋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로 돌아왔습니다. 부제 '윈터 솔져'처럼 캡틴 아메리카가 북극에서 냉동 상태가 되기전 잃어버린 동료 '버키 반즈'가 '윈터 솔져'로 돌아오는 내용이지만, 두 옛 동료의 대결이 전부인 영화는 아닙니다. '쉴드' 안에 숨어든 적의 비밀 조직 '히드라'의 음모와 맞서 고군분투하는 쉴드의 멤버들을 보여주면서, 지금까지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마블 히어로 무비 가운데는 가장 치밀한 스토리 라인을 보여줍니다. 캡틴 아메리카와 윈터 솔져의 대결과 쉴드와 히드라의 대결이 동시에 그려지면서, 130분 정도로 짧지 않은 상영 시간동안 느슨해지는 부분 없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스크린을 화려한 볼거리로 채우는 어벤져스 동료들(아이언맨, 헐크, 토르)과는 다르게, 방패 하나와 육체만으로 승부하는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은 '마블판 본 아이덴티티(Bourne Identity)'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맨손 격투의 화려함이나 영화의 짜임새는 '본 시리즈'를 따라가려면 아직은 부족하지만, 가족용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디즈니(Disney)'의 계열사로서 관람 등급에 신경쓸 수 밖에 없는 '마블 스튜디오'로서는 발전된 모습입니다.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정의'와 '애국심', 그리고 '우정'을 상징하는 '캡틴 아메리카'의 묵직함을 연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보입니다. 이제는 '닉 퓨리'가 아닌 다른 역할을 생각할 수도 없는 '사무엘 L. 잭슨'은 '안대'가 아닌 '선글라스'를 쓰고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궁금해 집니다. '어벤져스'에서 '호크 아이'와 러브라인이 있을 듯했던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는, 호크 아이가 없는 이번 영화에서는 캡틴과 러브라인의 기류를 형성합니다. 블랙 위도우의 '바람기'가 '어벤져스2'까지 이어져 스토리 라인에 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점은 4개입니다.

*'어벤져스' 속 본부로 등장하면서 수난을 겪었던 '헬리캐리어'가 이번에는 3대나 등장하지만, 제대로 활약을 하기도 전에 모두 격침되는 모습은 안타깝습니다. 다음 페이즈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본명 '스티븐 스트레인지'가 언급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2014/04/03 02:28 2014/04/03 02:28

진주의료원 폐쇄와 허울만 좋은 관치의료의 예견된 실패

작년 '진주의료원' 폐쇄 문제는 '공공의료의 죽음'이라며 수 많은 뉴스들의 제목을 장식했습니다. 진주의료원 폐쇄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려는 게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진주의료원 운영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고, 더불어 현재 한국 공공의료의 문제점을 사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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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료원 홈페이지 폐쇄 전에 캡쳐해둔 의료원의 '인력 현황'입니다. 숫자를 자세히 보면 이상합니다. 왼쪽 총 인원(계)은 244명이라는데, 왼쪽에 인원을 모두 더해보면 344명이 되어 계보다 딱 100명이 많습니다. 진주의료원이 200병상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간호직 184명'은 우리나라 의료 현실에서 비정상적으로 많아 보입니다. 간호직에서 100명을 빼면 양쪽의 수치가 같아지는데, 84명을 184명으로 잘못 기재한 점은 뭔가 이상합니다. 실수가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조작했다고 생각됩니다.

진주의료원의 적자보다 이상한 점은 의료원의 인력 구성이었습니다. 국내 일반적인 병원의 인력구성에서 '의료직(의사직+간호직)'의 비율은 보통 60% 정도인데, 진주의료원은 50%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간호직 인원이 84명이 맞다면 의사직 21명과 더한 105명이 되고 이는 244명의 43%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의료원 및 병원의 본질적인 기능은 '의료 서비스'입니다. 그 의료 서비스를 최전방에서 담당하는 '의료직'이 43%라는 점은 진주의료원이 방만하게 경영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노조가 인사에도 개입하였다고 하는데, 그 개입이 이런 비정상적인 인력 구성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수 차례의 경영 평가에서 문제점들이 지적되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의료원 폐업이 발표되면서 노조 측에서 잘못을 숨기기위해 저런 '어설픈 조작'을 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주의료원을 포함한 34개 지방의료원 가운데 대부분이 '만성 적자'라고 합니다. 몇몇 의료원이 흑자를 냈지만, 지방의료원 전체의 누적적자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입니다. 지방의료원 만성 적자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진주의료원의 비정상적인 인력 구성같은 '방만한 경영'일 수 있습니다. 의료원의 인건비 지출은 민간 병원 대비 150% 수준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의 지방의료원 운영 평가에서 높은 등급을 받은 의료원들조차도 적자에 시달린다는 점은 '방만한 경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의료원이 '건전한 경영'에도 적자라면 의료원의 수익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방의료원들이 민간병원들과는 달리, 사회적/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건강보험 급여항목' 위주로 진료 및 치료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급여항목 위주의 진료만으로는 적자를 피하기 어려운 현실은 의료 수가가 잘못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건강보험 급여항목의 수가는 원가 대비 70% 수준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가에 미치는 못하는 급여 항목의 수가는 급여 항목을 처방하면 할 수록 의료원/병원은 적자가 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민간병원의 경우 비급여 항목 및 병실료 등 다른 수입원 확충과 비정규직 채용 등의 인건비 절감으로 그 적자를 극복하지만, 상대적으로 비급여 항목 처방이 힘들고 인건비는 많이 지출하는 의료원에서는 그 적자를 메꿀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지방의료원들은 만성 적자에 시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의료원들의 만성 적자는 누구의 잘못일까요?

역대 대통령들을 비롯하여 수 많은 정치인들의 복지를 강조하면서 그의 하나로 공공의료 강화를 주장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 체계는 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을 통한 건강보험 의무가입과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라는 단일화된 체계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출마자들이 선심쓰듯 언급하는 공약이 '공공의료 강화'이고, 건강보험에 가입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용하는 '공공의료'입니다만 대한민국에 진정한 공공의료가 있을까요? 한 국가 의료체계의 공공성을 볼 수 있는 지표인 '국공립 의료기관 비율'이나 '국공립 병상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직접 느끼기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의 국공립 의료기관 비율은 6% 수준이고 병상비율은 10% 수준입니다. 그 수치가 무슨 의미인지 관심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인들이 국민을 설득하는 일에 즐겨 사용하는 'OECD 국가들'의 병상 비율의 평균인 75%에 비교한다면 기껏해야 1/7 밖에 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우리나라와 1인당 GDP 수준이 비슷한 체코는 91%, 스페인은 74%이고, 우리나라보다 경제 수준이 낮은 멕시코도 65%입니다. 우리가 '의료 지옥'이라고 부르는 미국도 놀랍게도 우리나라보다 높은 25% 수준입니다. 그런데 2014년 현재의 국공립 병원 비율과 국공립 병상 비율은 약 10년 전과 다른 없는 비율입니다. 한국전쟁 직후보다도 낮은 수치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후 복구'라하면 보통, 관공서와 도로/수도 같은 사회 기반시설 확충, 그리고 학교/병원 같은 교육복지 시설 확충이 떠오릅니다. 한국전쟁이 휴전한지 60년이 지났지만, 우리 정부는 아직도 '전쟁후 복구중'입니까? 두 지표들만 보면 우리나라 정부는 '한국전쟁 후에 의료시설 확충을 위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공공의료는 건국 이래로 없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낮은 국공립 병상 비율이 무슨 의미냐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모두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는데 낮아서 무슨 상관이냐는 사람도 있겠죠. 문제는 우리나라의 90%넘는 민간의료 자원들이 정부와 건보공단에 의해 거의 독점적으로 아니, 독재적으로 지배당하는 현실에 있습니다. 정부와 건보공단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의료 수가를 거의 일방적으로 책정해왔습니다. 매년 물가 인상율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상율이 계속되면서, 급여 항목이 원가 대비 70%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언제나 국민에게 '복지'를 운운하면서 복지를 위한 지출은 아끼고 싶은 정부, 그리고 선거철이면 '공공복지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정작 그 강화를 위해 필요한 현실적인 재원 확보(세금 인상과 건강보험료 인상)는 표심에 눈이 멀어 말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수십 년의 기만이 지금 한국 의료의 현실을 만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우리나라의 의료기술이 선진국 수준이고 선진국보다 더 좋은 의료 체계를 갖고 있다고 자랑스워하지만, 이는 희생으로 만들어진 허울 좋은 위상일 뿐입니다.  우리나라 의료의 대부분을 지탱하는 민간병원들은 급여 항목 진료로 발생하는 적자를 보존하기 위해, 인건비 절감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의료인의 과도한 업무 강도와 특히 전공의 착취로 이어졌습니다. '병원의 착취와 의료진의 희생' 없이는 병원의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공기업식의 운영으로는 병원 유지가 어렵다는 점을 알고 민간에 위탁 운영하고 있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의 역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위선적인 노동계는 세계화에 맞춰 주당 '40시간 근무'를 외치지만, 건강보험료 상승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의료계의 노동 착취 문제에 대해서는 모른 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전공의들은 주당 40시간은 커녕 주당 80시간은 기본이고 대부분은 10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임금도 근로시간으로 환산하면 최저임금 수준으로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일방적인 희생으로 이 제도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위태롭게 유지되었지만, 의료계와 의사들에게 쌓은 불만은 점점 폭발에 가까워졌고 문제점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무나 낮은 분만 수가로 산부인과 병원들이 문을 닫으면서, 지방에서 '모성사망율'이 증가하는 상황은 그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문제는 독점적인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에 있습니다. 시장경제를 도입한 국가들에서 독과점은 또 다른 죄악입니다. 물론 의료부문에서는 다르게 볼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독점은 높은 국공립병원 비율일 앞세운 독점이 아닌,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독점이라는 점입니다. 90%가 넘는 민간 의료 자원을 거의 강제적으로 억압하여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나라 '관치의료'의 현실입니다. 이는 분명 반자유주의적이고 반시장경제적입니다. 기업으로 예를 들면, 한 기업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가장 강력한 의결권을 가진 최대주주입니다. 최대주주는 말 그대로 기업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업을 우리나라 의료 체계로 보면 '지분 비율'은 '의료기관 비율'이 됩니다. 그런데 5% 수준의 지분(병원)을 가진 주주인 '정부'가 '의료체계'라는 기업에서 95%의 지분을 가진 '민간병원'을 지배하는 모습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상황은 적은 지분으로도 대기업을 지배하는 소위 '재벌'들의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현재의 독재적이고 착취적인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그 사유재산에 대한 합법적인 권리를 존중하는 '상식적인 자유시장경제적이고 자유민주주의적인 사고'으로 본다면 비정상적이고 불합리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그 비정상과 불합리는 누군가에 의해 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의료영리화를 허용하려는 '정부', 건강보험을 사보험으로 대신하려는 '대기업들', 우리나라 의료 시장에 군침을 삼키고 있는 '외국계 자본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라는 독재에서 벗어나려는 '의료계와 의사들'까지 수 많은 상황들은 결국 의료민영화와 의료영리화를 향하고 있습니다. 적은 지분으로 대기업을 휘두르던 재벌들의 입지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보다 더 빨리 정부와 건보공단은 '의료 체계'에서 영향력을 잃을 것입니다. 낮은 국공립 병원 비율과 낮은 국공립 병상 비율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다분히 위헌의 소지가 높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위험을 받고 민영화와 영리화의 수순인 '선택지정제'로 바뀌게 된다면, 정부와 건강보험공단이 '공공의료'로서 건강보험으로 강제 지정할 수 있는 병원과 병상이 각각 6%와 10%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강제 가입'으로 유지되었던 국민건강보험도 자연히 '선택 가입'으로 바뀌게 될 수밖에 없고, 건강보험으로서의 입지도 위태로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90%를 차지하는 민간병원의 수가는 지금까지 쌓였던 불만히 한꺼번에 폭발하듯 상당히 오를 수 밖에 없고, 결국 미국처럼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이유로 병원의 문턱을 넘을 수도 없게 될 가능성이 급니다. 우리 정부가 60년동안 공공의료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대가를 국민들이 받게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재 정권에서 시작되었고, 독재가 끝난 뒤에도 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이 악용하여 '의료 시장에 대한 독재적 억압'은 이제 황혼에 있습니다. 국내 의료 시장 관한 여러 수치들과 통계들을 본다면, 민영화와 영리화는 이제 빠르냐 느리냐의 문제이지 막을 수 없는 '예정된 결론'으로 보입니다. 국민으로서 묻고 싶습니다. 한국전쟁 후 6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우리 정부는 무엇을 준비했습니까? 기나긴 관치의료의 실패 뒤에는 우리가 '의료 지옥'이라고 부르는 미국보다 더 무서운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대기업과 외국계 자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 독재의 권좌에서 끌어내려져 단두대로 향하기 전에, 정부와 건보공단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양보하고 타협할 기회를 놓친다면, 혹독한 대가가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2014/03/26 15:20 2014/03/26 15:20

세계대전 Z - 맥스 브룩스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는 '브래드 피트'가 제작자 및 주연으로 국내에는 "월드워 Z"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영화의 원작이디. 영화 속 내용을 상상하면서 이 책을 읽었는데, 영화가 '좀비의 대공습'이라는 주재와 몇 가지 소재를 빌려갔을 뿐 줄거리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예 장르가 다르다고 해야할까?

원작이 헐리우드식 영웅물이라면, 이 원작 소설 속에는 영웅은 없고 '세계대전 Z'에서 살아남은 인간들만이 있다.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다르게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영화는 두 시간이 안되는 시간에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지만, 원작 그대로 드라마로 만든다면 아마 시즌 몇개는 나올 만큼 적지 않은 분량의 이야기다. 500 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이지만, 작가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여러 생존자들의 입을 빌려서 지루하지 않고 상당히 몰입감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일반적인 소설들이 따르는 서사적 구조가 아닌, 미국 부통령부터, 군인, 의사, 일반 시민 등 전세계 각계 각층의 사람들의 녹취된 체험담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이 체험담을 통해 좀비 전쟁을 꽤나 생생하게 풀어나간다. 여러 생존자들의 녹취록들에는 사건이 벌어진  시간적 혹은 공간적 차이 뿐만 아니라, 각 생존자들의 국적, 인종, 직업이나 사회적 위치, 그리고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좀비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체험담의 조각들이 모여서 '인류를 멸종 직전까지 몰고 갔던 대재앙, 좀비 전쟁'의 큰 그림을 그려간다. 좀비 자체는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황당한 재난'이지만, 그 전쟁 속에서 있었던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사람들의 생각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가는 모습까지 그려낸 작가의 치밀함과 노련함에 감탄하게 된다. 

'체험담' 위주로 풀어나갔기 때문에, 이 책만으로는 생존자들이 보지 못했던 좀비 전쟁의 다른 부분이나, 전세계에 걸친 좀비 전쟁이 어떻게 퍼져나가고 어떻게 끝났는 지를 확실하게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좀비'라는 것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리고 '좀비의 생태(?)'대해서도 불분명한 점도 아쉽다. 저자 맥스 브룩스가 쓴 '세계대전 Z 외전'과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도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 겠다.

2014/03/09 22:58 2014/03/09 22:58

과대망상의 원격진료, 실효성이 없는 이유들

정부가 시행한다는 '원격진료'. 듣기에는 상당히 미래적이고 진취적이고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과연 기술적 실효성이나 복지로서의 사업성을 올바르 평가했는지 의심이 듭니다. 의사로서 현재 원격진료의 문제점들을 생각해봅니다.

1.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점으로, 진료는 원격으로 하지만 어차피 처방된 약의 조제는 원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약국들의 병의원 근처에 있는데, 원격으로 진료를 받고 다시 약 때문에 약국으로 가는 상황에서 원격진료는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보입니다.

2. 우리나라 어르신들 뿐만 아니라 아직 많은 사람들이 병의원에 가면, 주사라도 한 대 더 맞고 물리치료처럼 간단한 처치라도 한 번 더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원격진료 장비가 설치되더라도, 이런 선호도 때문에 한두 번 사용하고 방치될 공산도 큽니다.

3. 원격진료 장비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지방 면단위에 사시는 어르신들 대부분은 컴퓨터 조작을 못하실 뿐만 아니라, 글을 못 읽는 분들도 종종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원격진료 컴퓨터 장비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 교육한다고 해도, 한두 번으로 교육으로는 익숙해지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교육해도 이해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구요. 더구나 청력이나 시력이 떨어져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시력 저하의 경우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고, 청력 저하의 경우 정말 옆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진료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원격진료 장비를 이용할 수 있을까요? 의사나 환자나 진료가 매우 불편하거나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4. 대부분의 지방 면 단위에는 '보건지소'가 있고 대부분이 의약분업 예외지역에 있어서 보건지소에서 진료/처방 및 약의 조제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시도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지자체에서는 면 단위 보건지소의  65세 이상 환자에게 진료비 및 약제비를 지원해서 '무상 혹은 매우 저렴한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의원에서 가져온 처방전의 조제는 되지 않지만, 보건지소에 있는 약에 한해서 의사의 처방과 조제가 이뤄지고 있구요. 그리고 보건지소는 시내의 의원이나 약국보다 환자와 더 가까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화상진료를 하고 시내로 나가서 자비로 조제를 받는게 빠를까요? 아니면 그냥 보건지소로 가서 진료보고 처방받는 것이 빠를까요? 비용적인 면이나 편의적의 면이나 기존의 보건지소를 이용하는 편이 빠르고 편리해 보입니다.

5. 기술적 한계도 있습니다. 진료에서 환자가 목이 아프면 설압자와 팬라이트로 목구멍을 보고, 귀가 아프면 이경으로 보고, 배가 아프면 청진을 합니다. 이런 진료의 기본이 되는 기능조차 구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화상채팅 수준'의 원격진료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진료는 단순히 '화상대화'만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청진이나 시진 뿐만 아니라, 의사가 직접 만져보고 두드려보는 여러가지 신체 검사(physical test)가 필요할 수도 있고, 질환이나 질병에 따라서는 환자의 움직임이나 걸음걸이도 진단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보건지소에서 진료할 수 없는 수준의 질병은 현재 기술 수준의 원격진료 장비로도 어차피 진료가 불가능합니다. 진료의 기초도 보장하지 않는 수준의 원격진료 장비를 보급하겠다는 건, 식약청이 '효과도 없는 약'을 승인해주고 판매하도록 허가하는 '대국민 사기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브레이크도 에어백도 없고 기본적인 주행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자동차를 판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6. 원격진료를 대학병원의 유명한 의사가 진료해주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대부분의 대학병원 유명한 의사들은 예약이 수일에서 수주까지 이미 완료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원격진료를 하려고 수일에서 수주를 기다려야 하나요? 가까운 병의원이나 보건지소를 가는 편이 낫지 않나요? 앞서 언급한 점처럼 원격진료라면 아무래도 의사 소통에도 불편한 점이 많아서 환자 한 명 당 진료 시간이 늘어날 수 밖에 없을텐데, 가뜩이나 환자가 몰리는 대학병원에서 '대면진료 환자 두 명' 볼 시간을 '원격진료 환자 한 명'을 위해 할애하려 할까요?

7. 단순 감기만을 위해 이용한다면 이는 또 얼마나 낭비인가요? 정부가 걸핏하면 언급하기 좋아하는 그 OECD 국가들의 국민들이 단순 감기로 얼마나 병의원을 찾을까요? 우리나라는 비정상적으로 낮은 수가 덕분에 단순 감기에도 병의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다른 OECD 국가들은 대부분 단순 감기는 슈퍼마켓에서 구입할 수 있는 종합감기약으로 치료하지 않나요? 단순 감기을 폐렴이랑 혼동하면 어쩌나구요? 감기와 폐렴의 감별은 어차피 지금의 원격진료 장비 수준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원격진료 장비를 지원보다 기본적인 상비약을 지원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지 않나요?

8. 허술해질 수 밖에 없는 원격진료에서, 오진은 의사 책임이다? 제대로 교육받은 정상적인 사고 방식의 의사라면, 지금 기술 수준의 원격진료는 하지 않으려는 게 정상입니다.

원격진료는 기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실제 임상에 적용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연구 개발이 필요한 상황인데, 왜 정부는 서둘러 도입하려 할까요? 5년 혹은 10년의 연구 개발 기간을 두고 정부가 원격진료 기술 발전에 투자한다면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의 기술 수준이 SF 영화에 등장하는 '전신 스캐너' 수준이라면 원격진료에 반대하는 집단은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의사의 시각에서 지금 정부가 시급하게 도입한다는 화상채팅 수준의 원격진료는, '효과가 있는 약을 임상시험 없이도 사용하게 하겠다'가 아니라 '효과도 없는 약을 세금으로 사겠다'는 말과 다름 없어 보입니다. 국토가 넓지 않고, 비용적인 측면에서의 의료 접근성도 최고인 대한민국에서 시기상조인 미완성의 원격진료를 성급하게 도입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도 그렇게 원격-화상채팅-진료가 하고 싶다구요? 그럼 크고 복잡하고 사용하기 어려운 PC를 이용하기보다 직관적이고 상대적으로 사용하기 쉬운 '아이패드'같은 제품에 의료관련 앱 좀 넉넉히 설치하고 배포해서 '페이스타임'을 이용하는게 더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로서는 안정적이고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그건 '그 기업' 이익이 되지 않으니 안된다구요?

정말 '국민의 건강'을 위해 우선 해결해야 할 일들은 따로 있습니다. 도서 지역들 오지의 의료 수준 향상을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원격진료 장비가 아니라, 응급 상황에서 환자를 위한 수송 수단과 응급 환자를 치료할 응급 의료 인력입니다.
2014/03/08 20:30 2014/03/08 20:30

해오 - Structure

아이돌로 커리어를 시작한 어떤 가수는 시간이 지나 싱어송라이터가 되기도 하고, 어떤 싱어송라이터는 파격적으로 댄스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제 소개할 싱어송라이터 해오(Heo, 허준혁)는 그 정도의 파격적인 변신까지는 아니지만, 2009년 발표했던 첫 정규앨범 "Lightgoldenrodyellow"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의 새 앨범 "Structure"을 발표했다. 어두운 분위기의 앨범 자켓부터 그런 변화를 예상하게 하는데, 해오의 지난 활동 이력을 되돌아본다면 필연적인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올드피쉬(Oldfish)'의 멤버로서 본격적으로 인디씬에 뛰어든 그의 경력에서, '일렉트로닉'은 항상 함께 해온 장르였다.

솔로 뮤지션 '해오'로 활동하기 전, '올드피쉬'시절부터 그가 EP까지 발표했던 또 다른 이름 'yellowmayonaise'까지 포괄적으로 정리했던 그의 데뷔앨범은 '일렉트로닉을 살포시 머금은 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데뷔앨범이 발표된 2009년과 두 번째 앨범이 나온 2014년 사이의 5년을 살펴보면, 지난 앨범처럼 새 앨범 'Structure'도 어느 정도 '정리'의 의미를 담고 있어 보인다. 데뷔앨범이 나온 2009년에 그는 다른 이름으로 EP 하나를 발표했다. 바로 'DJ Gon'과 한 프로젝트 '스타쉽스(Starsheeps)'로 발표한 "Luna"이다. (이 프로젝트에 그는 기타리스트 'Mayo'라는 이름으로 참여했는데, 'yellowmaynaise'에서 가져온 별명으로 생각된다.) 이 EP는 그가 2009년 이전부터 일렉트로닉 씬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교류를 알려주는 점이다. 앨범 발매일을 보면 해오 1집의 발매일이 2009년 1월 15일이고 EP "Luna"의 발매일이 2009년 2월 16일로 고작 1개월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두 가지 작업을 병행하고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실제로 2009년에 그는 인디씬에서는 싱어송라이터 '해오'로, 클럽씬에서는 기타리스트 'Mayo'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스타쉽스의 작업이나 그가 세션 기타리스트로 참여했던 'TV Yellow' 활동은 EDM과의 접점으로 볼 수 있는데, 새 앨범 "Structure"는 EDM뿐만 아니라 IDM과 포스트록까지 아우르는 소리들을 담고 있다. '일렉트로닉' 자체가 상당히 광범위한 장르로 볼 수 있는데, 앨범 "Stucture"도 그만큼이나 다양한 스타일의 트랙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다양함은 '난잡함'이 아니라 어떤 응집력을 갖고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면 제목처럼 어떤 Stucture를 완성해가는 앨범이다.

'기초적인 소리'를 의미하는 듯한 제목의 intro인 'Sound of A'는 일렉트로닉 장르의 기본인 전자음들로 풀어나간다. 이어지는 'Luna'는 앞서 언급했던 프로젝트 '스타쉽스'의 EP "Luna"에 수록되었던 트랙이기도 하다. 춤추기 좋은 EDM이었던 스타쉽스 버전과는 다르게, 느린 템포로 진행되면서 마치 '디스토피아적이고 황량한 꿈'처럼 들린다. '달' 혹은 '달의 여신'을 의미하는 제목처럼 달의 기운을 받았는지, 굉장히 섹시하게 들리는 해오의 보컬은 상당히 농밀한 섹시함을 숨기고 있다.  'Word of Silence'는 제목과는 다르게 다소 소란스러운데, 몽환적인 여성 보컬과 타격감이 살아있는 드럼 연주가 두드러지는 트랙이다. 앨범 대부분의 곡들이 앨범 자켓처럼 어두운 분위기인데, 반어적으로 제목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Good day'도 제목과는 다르게 어둡고도 몽환적이다. 'Reckless'는 아무래도 'Moby'의 곡들이 생각날 수 밖에 없는 트랙이다. 음성변조부터 군더더기 없고 경쾌한 진행 등 여러 점에서 그렇다.

지난 앨범과의 접점을 억지로라도 찾으라면 'All the things are passing by', 이 곡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전자음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기타 반주로 이끌어가는 점에서, 일렉트로닉 성향이 짙은 이번 앨범보다는 지난 앨범에 가깝게 들린다. 제목과 가사에서는 인생에 대한 소탈한 깨닮음이 느껴지는데, 1집도 그렇겠지만, 이 앨범이 발매되기까지도 순탄하지 않았음을 예상하게 한다. 'Ride the Wave'는 보컬을 거의 알아들 을 수 없기에, 연주 위주로 진행되는 드림팝 넘버라고 할 수 있겠는데, 높낮이 변화하며 반복되는 파도같이 부드러운 완급조절로 4분이 넘는 시간을 흡인력있게 이끌어 간다. 이어지는 'Hard to Keep'은 러닝 타임이 11분에 이르는 대작이다. 온라인 음원으로는 한 곡으로 판매되었지만, CD에는 3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수록되었다. 파트 1이 '차가운 일렉트로니카'라면, 파트 2의 전반부는 그의 기타와 록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관심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파트2 후반부의 크로스오버를 지나면 파트 3는 앞의 두 파트가 만난 '정반합'의 경지처럼 들리기도 한다. 매우 긴 곡이지만 다채로운 변화 속에서도 한 곡으로서 일관성을 잃지 않아서, 11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러 곡처럼 들리면서 동시에 한 곡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이 점은 비단 이 곡 뿐만 아니라 '일렉트로닉'이라는 공통 분모로 묶이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소리들이 모여서 구조(structure)를 완성해간다. outro 'in sight of light'는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의 긴 터널' 같았던 이 앨범을 갈무리하는 트랙이다. 제목처럼 다소 밝은 분위기인데, 마치 어떤 소리들을 거꾸로 재생할 때처럼 독특하게 들린다.

공감할 만한 감성적 가사와 어렵지 않은 멜로디를 들려주었던 그의 첫 정규앨범은 비교적 대중성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일렉트로닉으로 가득한 두 번째 앨범에서는 그 대중성과는 멀어진 느낌이다. 하지만, 지난 앨범 "Lightgoldenrodyellow"가 '탁월한 감성'을 들려준 앨범이었던 반면, 이번 앨범은 대중성은 줄었지만 더욱 완성도 높은 음악성을 보여주고 있다. '원자력공학'을 전공했다는 그의 이력을 고려한다면, 일렉트로닉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앨범이 나온다면 ambient와 같은 장르를 들려주지 않을까?"라고 재밌는 상상해본다. 별점은 4.5개.
2014/03/06 02:17 2014/03/06 02:17

Haim - Days are gone

형제자매로 구성된 밴드를 나열하라고 한다면, 나이가 지긋한 누군가는 'Capenters'와 'Bee Gees'를 떠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Hanson'이나 'the Moffatts', 'the Corrs', 혹은 'Jonas Brothers'같이 비교적 젊은 세대의 밴드를 떠올릴 수 있겠다. 이제 형제자매 밴드 리스트에 새로운 이름을 추가해야 겠다. 바로 'Haim'이다.

Haim은 국내에는 아직도 낮선 이름이지만, 첫 정규앨범이 발표하기 전인 2012년 말부터 영국 BBC의 컨테스트 'Sound of 2013'의 우승자로 이름을 알리는 동시에 기대를 모은 밴드이다. 독특한 점은 앞서 나열한 밴드들이 모두 형제 혹은 남매 밴드였지만, 이 밴드는 '자매 밴드'라는 점이다. (영국이 아닌) 캘리포니아 출신의 세 자매 Este Arielle Haim(1986), Danielle Sari Haim(1989), 그리고 Alana Mychal Haim(1991)로 구성된 이 밴드는 여느 형제자매 밴드들처럼 성(family name)을 밴드 이름으로 사용했다. 모두 20대 밖에 안되는 세 자매의 밴드라고, 보통 여자 아이돌처럼 말랑말랑하거나 달콤한 음악을 한다고 하면 큰 오산이다.  꾸미지 않은 생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마치 8,90년대 남성 락스타들처럼) 기른 세 자매의 헤어스타일은 이들의 음악이 아이돌 밴드와는 거리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또, 어린 시절부터 가족밴드 및 걸 그룹 활동을 하면서 음악과 함께 자란 세 자매는 모두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를 줄 안다고 한다. Haim에서는 주로 베이스를 연주하는 Este는 기타도 연주할 수 있고, 메인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는 Danielle는 드럼 세션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고, 주로 키보드를 연주하는 Alana도 기타와 퍼커션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0년 대부터, 급부상한 밴드들이 장르파괴적인 음악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이제는 장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구분이 무의미해고 있는데, 이 밴드의 음악 역시 그렇다. 1970년대 활동한 soft rock 밴드 'Fleetwood Mac'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세 자매의 주장에 따르면 R&B/Hip-hop가 혼합된 folk rock 정도로 들릴 수도 있다. 혹자는 Glam rock 등 Hard rock과 Garage rock을 들려준다고도 평하기도 한다. 이처럼 듣는 이에 따라서 규정하는 장르가 다양할 만큼 Haim이 여러 장르의 밴드들의 영향을 받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확실히 복고적인 요소를 들려주고 있지만, 복고를 바탕으로 그를 뛰어넘는 '새로움'을 들려주는 점이 이 밴드가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이유가 아닐까?

여성 3인조 밴드의 음악으로서는 상당히 파워풀하고 연주와 강렬한 훅을 갖추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밴드의 음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점은 여성 밴드로서 의외의 진정성을 넘어선 '어떤 특별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힌트는 이 세 자매의 큰 언니인 Este의 경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ste의 경력을 살펴보면 2010년 UCLA에서 ethnomusicology(민족음악학) 학위로 졸업했다고 한다. 민족음악학은 그 이름처럼 기본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들의 '민속 음악'을 비교하는 학문인데, Haim의 음악에서도 그런 '민속음악'적인 요소들 녹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민속 음악'적 요소는 Haim의 데뷔 앨범 "Days are gone"의 첫 곡 'Falling'에서부터 보인다. 이 곡은 세 번째 싱글로 발표되었던 곡으로, 이 앨범의 두 번째 곡이자 첫 번째 싱글이었던 'Forever'와 더불어 'Haim'을 각인시킨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의 후렴구는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볼 만하다.

"into the fire feeling higher than the truth
I can feel the heat but I'm not burning
fear and desire feed the tired, hugry tooth
feel like I'm falling
I can hear them calling for me"

듣기에 따라서는 굉징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으로 들리는 후렴구이다. 이 부분을 부르는 Danielle의 음성은 톤을 높여 부르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혹은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이 떠오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Forever에서도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분위기의 후렴구를 갖고 있다. 가사를 옮겨보면 이렇다.

"go get out get out of my memory
no not tonight I don't have the enery
go get out get out of my memory
no not tonight..."

일정한 톤으로 단어와 구를 반복하는 이 부분은 마치 어떤 '주문'처럼 들린다. 종교적 의식과 연관시키자면 무속 신앙의 '퇴마 의식'떠올릴 수도 있겠다.

네 번째 싱글이기도 한 'the Wire'에서도 민속음악적 요소들을 들을 수 있다. 앞선 곡들과 마찬가지로 가사의 끝을 꺾거나 적절하게 들어가는 추임새는, 흑인 음악에서 기원한 하는 blues와 hip-hop에서 들을 수도 있지만, Danielle와 Este가 주고 받으며 부르는 형식이나 구성진 연주는 우리 전통음악의 '타령'처럼 들리기도 한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Let Me Go'의 경우 시작부터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초반부에서 Danielle가 읊조리듯 풀어내는 가사와 제창으로 부르는 'Let Me Go', 이어지는 Este의 노래에서 'Let Me Go'의 끝을 구슬프게 꺾어올려 부르는 부분과 돌림노래처럼 부르는 부분, 그리고 노래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는 타악기 연주가 긴장을 고조하는 점은, 마치 망자의 영혼을 달래는 일종의 '장송곡'처럼 들리게 한다.

더불어 세 자매가 들려주는 화음은 여성 밴드만의 매력을 더 한다. (Este의 꽥꽥거리는 느낌의 목소리나 힘이 부족한 Alana의 목소리는 Rock 밴드의 메인 보컬로서는 어울리지 않아서, 중저음의 Danielle가 메인 보컬) Danielle의 메인 보컬 위로 두 사람이 쌓아가는 목소리는 남성으로만 구성된 밴드들에서는 들을 수 없는 화음을 만들어내고, 이 화음은 복고의 느낌과 더불어 남성 중심의 rock과는 다른 신선함을 부여한다.

Haim 데뷔앨범 'Days are gone'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세 자매의 치기어린 앨범이라고 할 수 없는 굉장한 앨범이라는 점이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세 자매는  점점 말랑해져만 가는 남성 중심의 rock 음악 저변에 주목할 만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여러 장르의 적절한 차용, 그리고 정통적 밴드 사운드와 미니멀리즘을 적절하게 배치한 노련한 완급조절은 이 앨범이 20대 자매들로 구성된 밴드의 첫 앨범이라고 믿기 어렵게 한다. 하지만, 어쩌면 신인이기에 이런 시도들을 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2013년 최고의 신인이라고 할 만하다. 별점은 4.5개, 반 개는 다음 앨범을 위해 남겨두고 싶다.



2014/02/18 17:43 2014/02/18 17:43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 이애경

사실 전혀 모르는 작가이고 요즘 거의 관심 없는 장르의 책이지만, 정말 우연히 구입하여 일게 되었다. 제목에 대한 첫인상은 상당히 허세스러웠다고 할까.

내용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책의 '영리한 구성'을 빼놓을 수 없겠다. 텍스트만으로는 책 반 권도 나오지 않을 분량이지만, 작가가 직접 찍었다는 사진들을 이용하여 한 권을 채우고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짧은 글들이지만 읽기에는 그다지 가볍지 않을 수도 있는 내용들을 감성적인 사진과 함께 담아서, 사이사이 주위를 환기시켜주고 있다. 작가의 고집이었는지 아니면 편집부의 전력이었는지 알수 없지만, 분명 '사진 + 텍스트'의 구성은 '미니홈피(싸이월드)'의 '일기장'과 '사진첩'이나 블로그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런 반 쯤은 개인적이고 반 쯤은 공개된 새로운 도구에 익숙한 지금의 2,30대에게 이런 구성은 충분히 친숙하고 편안하게 다가갈 만하다. 역시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거쳐 블로그를 사용하고 있는 나에게도, 주로 여성 사용자들이 사진과 함께 올렸던 (허세도 적당히 들어간) 감성적인 문장과 문단들이 떠올랐다.

글의 내용들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20대의 연예에 대한 회한과 30대의 다짐, 그리고 노처녀의 허세'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예민한 관찰력과 감성적인 표현력으로 써내려가 감수성이 더해진 글들은 공감의 요소를 만들어낸다. 최근 '웰빙(well-being)'에 이어 '힐링(healing)'이 유행하면서 힐링을 강조하는 감성 에세이들이 많이보인다. 이 책도 그런 시류에 편승하여 쉽게 써져서 쉽게 소비되는 소비재로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2000년대 초반에 불었던 시집 열풍이 '미니홈피와 블로그 세대'에 적합게 변형되고 포장된, '새로운 에세이의 사조'라고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이애경 작가의 글에는 신문의 가쉽란처럼 가볍게 읽고 잊고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알맹이가 있다.
2014/02/12 11:45 2014/02/12 11:45

남녀공룡 (unisexsaurus) - Love is in the Ear (EP)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디레이블'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레이블은 두세 곳 정도입니다. 하지만 최근 무섭게 떠오르는 레이블이 있으니, 바로 '매직스트로베리 사운드(MSB Sound)'입니다. 이제는 레이블 대표 뮤지션이라고 할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옥상달빛'이 바로 MSB 소속이고, 파스텔뮤직 소속이었던 '요조'와 '루싸이트 토끼'나 인디씬에서 인지도가 있는 '카프카'와 '이영훈' 등을 영입하면서 몸집을 불려가는, '인디씬의 신흥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메직스트로베리 사운드'는 인디음악을 어느 정도 들어본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레이블이지만, 아직도 소속 뮤지션들은 낯설게 들립니다. 저도 MSB는 레이블의 초창기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 소개하는 '남녀공룡'은 작년 말에야 알게 된 뮤지션입니다. 바로 2013년 시작된 MSB의 컴필레이션 프로젝트 '내가 너의 작곡가 vol.1'에 참여한 팀이 이름 가운데 '남녀공룡'이 있었고, '요조'와 함께했다는 호기심에 처음으로 듣게 된 그의 곡이 바로 'This means Goodbye'였습니다. 요조의 차분한 음성과 우주적인 느낌의 사운드로 담담하지만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이별을 노래하는 이 곡은 묘한 중독성으로 이 컴필레이션에 함께 수록된 다른 어떤 곡보다도 귀를 사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남녀공룡'에 대한 궁금증에, 2012년에 발매되었던 그의 첫 EP 'Love is in the Ear'를 들어 보았습니다.

서정적인 신비로움을 담고 있는 오프닝 'Sincerely'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Dear J'는 일렉트로닉과 팝이 바탕이 된 깔끔한 사운드를 들려줍니다.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고 제목도 그 'J'에게 보내는 곡인데, 앞선 오프닝이 보통 영문 편지에서 끝맺음 말로 쓰는 'sincerely'라는 점은 재밌습니다. 'Moonlight'는 제목처럼 신비로운 달빛같이 몽환적인 트랙입니다. 제목은 '달빛', 혹은 '월광(月光)'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달을 의미하는 'luna'에서 파생되어 '광기'를 의미하는 단어 'lunatic'이 떠오를 만큼 어떤 광기가 느껴집니다.

'Blueberry Dream'이라는 제목처럼, 상큼하고 달달하게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쓰여진 영어 가사와 라운지풍의 연주는 여러보로 일본 시부야계/라운지 음악을 떠오르게 합니다. 특히 나른한 음성은 'Paris Match'의 보컬 '미즈노 마리'의 음성을 떠오르기도 합니다. 'Last Lullaby'는 제목처럼 앨범을 끝맺는 마지막 곡으로서 '마지막'에 어울리는 어쿠스틱 풍의 트랙입니다. 언제가 찾아올 이별을 기다리며, 혹은 그 이별에 순간에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운 감정들이 전해집니다. 이 곡이 그려내는 잔잔하지만 강렬한 이별의 이미지는 요조와 함께한 'This means Goodbye'와도 닿아있습니다.

앨범 내내 여성의 음성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노래하지만, 남녀공룡은 남성이라는 점이 재밌습니다. 보코더로 음성을 변조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미성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은 '남녀공룡'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의 이름과 독특한 음성적 선택에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남녀공룡이라는 난해한 이름과는 다르게 EP 'Love is in the Ear'는 난해하지 않고 듣기 편안한 일렉트로니카를 들려줍니다. 언제 정규 1집 혹은 후속 음반이 나올 지는 알 수 없지만, 더 많은 그의 노래들을 기대해 봅니다.
2014/02/06 15:35 2014/02/06 1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