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파스텔뮤직의 컴필레이션 '12 Songs about You'.
이번 컴필레이션은 파스텔뮤직의 공식적인 소개로는 2006년 초에 발매된 'Cracker : compilation for a bittersweet love story(이하 Cracker)'의 연장선 위에 있는 음반이랍니다. 엄연히 따지면 '공식적인 후속작'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기획의도나 내용물에서는 충분히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Cracker'와 마찬가지로 한 작가의 일러스트들과 함께한 음반이라는 점이과 사랑 이야기를 모았다는 점이 그 공통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번 앨범의 북클릿을 보면 함께한 작가 'Lemarr'의 그림이 낯설지 않은데, 바로 '파니핑크(Fanny Fink)'의 앨범에도 참여했더군요.
디지팩을 보면 연기가 자욱한 고층 빌딩 위로 거대한 남녀가 입맞춤을 하고 있고 그 뒤로 헬리콥터와 전투기가 날고 있습니다. 이런 과장된 표현이 그 순간의 환희를 명료하게 느끼게 합니다. 디지팩 안쪽에 붙어있는 북클릿은 각 곡마다, 한 쪽면에는 일러스트를, 다른 면에는 가사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일러스트가 먼저 그려졌는지 아니면 곡이 먼저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꽤나 괜찮은 어울림을 보여주고 있구요.
앨범의 문을 여는 첫 곡, '루싸이트 토끼'의 '봄봄봄'은 '눈을 감고 느끼는 따뜻한 봄의 햇살'같은 곡입니다. '루싸이트 토끼'는 '미스티 블루', '어른아이', '파니핑크' 등과 더불어 '정통 파스텔풍(?)여성 삼인조 밴드로, 차분한 노래와 연주가 어우러져 수줍은 고백과 봄의 나른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All Right'은 '박준혁'이라는 파스텔뮤직의 신예 뮤지션의 곡으로, Cracker에 참여했고 지금은 해체한 '푸른새벽'의 멤버였던, '한희정'이 참여했다는 점에 더 눈이 갑니다. 제목처럼 헤어짐이 지나가고 회복된 마음을 'All Right'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두 남녀 보컬이 들려주는 노래는 제목처럼 밝으지만, 그래서 좀 슬프게 들립니다. 빠쁜 건반 연주는 잊기위해 빠쁘게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을 비추는 느낌입니다.
'꽃'은 '요조 with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곡으로,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이하 소규모)'의 이름이 featuring이 아닌 with로 붙어있는 만큼 이 밴드의 색을 그대로 들려줍니다. '요조'의 새침한 보컬이 돋보이지만, 곡 자체는 '소규모'의 2집 '입술이 달빛'을 닮아있습니다. 가사에서 '너'를 표현하는 꽃, 바람, 봄 등은 단지 '너'의 소중함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변할 너의 모습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시간이 흐르면 꽃이 지고, 바람이 그치고, 계절이 바뀌는 세상의 이치처럼요. 'MINHONG'이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했던 '소규모'의 리더 '김민홍'이 '요조'를 만나 '외도'에서 '확장'으로 노선을 변경했다고 할까요. '요조 with 소규모아카시아밴드'는 10월에 1집 발매 예정입니다.
'My Girl You Blush'로 참여한 'moi Caprice'는 덴마크 밴드입니다.. 보컬의 음성때문에 첫인상은 영국 'Suede'의 '브렛 앤더슨'이 떠올랐고, 댄서블한 복고풍도 'Suede'를 생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가사도 재밌는데, 술이라도 마시고 고백하라는 독려의 가사는, 역시 댄서블한 음악을 들려주는, 'W(더블유)'의 곡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앞서 featuring으로도 참여한 '한희정'의 목소리는 그녀의 곡 '우리 처음 만난 날'에서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처음 만난 날의 기쁨을 노래한 이 곡은 '푸른새벽'의 우울함과 대비해도 참 좋습니다. 하지만 가사를 잘 음미하면 '우리 처음 만난 날'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그 날을 회상하는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앨범은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는 점이 아쉽네요.
'Sail on Heaven’s Seas'는 'Ben & Jason'이라는 남성 듀오의 곡입니다. 이 달콤한 곡은 우리에게 친근한 '데미언 라이스'나 '앨리엇 스미스'를 떠오르게 합니다. 가사는 어떤 비극을 노래하고 있는데, 화자의 경험이라기보다 화자의 마음 속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느낌입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줄 때처럼 음침한 목소리도 인상적입니다. 앞으로 기대가 되지만, 이 듀오가 이미 해체했다고 하니 이제야 알게 되어 아쉽네요.
‘모노리드’라는 신예 4인조 밴드가 부른 ‘스파티필름’은 예상외로 화초의 이름입니다. 가사는 숨어서 ‘미녀’를 지켜보는 ‘야수’의 마음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자조적인 곡의 분위기나 보컬의 느낌이 인기밴드 ‘넬’과 비슷합니다.
‘The Saviour’는 가성도, 진짜 목소리도 너무나 멋진 남자 ‘Maximilian Hecker’의 곡입니다. 가사에서 ‘Saviour’라는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구원자’를 잃은 절망감을 노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을 노래하는 목소리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차분합니다. ‘소란’보다 ‘정적’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처럼, 체념하고 초탈한 마음은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습니다. 제목의 ‘Saviour’나 가사의 ‘Father’때문에 마지막 기도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Yellow Train’은 오해를 살 수 있는 이름 ‘빅뱅’의 곡으로 ‘봄봄봄’을 들려준 ‘루싸이트 토끼’의 보컬 ‘조예진’이 참여했습니다. '노란 열차'를 타고 떠나는 아른한 봄여행같은 느낌으로, '조예진'의 목소리는 '봄봄봄'과는 또다른 느낌입니다.
긴 제목의 ‘For Once in Your Life Try to Fight for Something’은 앞서 한 곡을 들려주었던 ‘moi Caprice’의 곡입니다. 앞선 곡보다 차분한 이 곡은 '다가가지 못하고 바람보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른 곡처럼 느껴지는 곡 마지막의 에필로그(?)도 인상적인데, 아마 '화자'는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손’은 ‘어른아이’의 곡으로 이 밴드의 여느 곡들보다 밝고 따듯한 느낌입니다. 맞잡은 손은 놓았지만, 그 온기는 남아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고 할까요? 보컬도 좋지만 코러스가 상당히 좋습니다. 물론 동일 인물이 불렀지만 코러스를 듣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드네요.
'소규모아카시아밴드'로 참여한 이 앨범의 마지막 곡 '너'와는 '꽃'과 비교하면 다른 느낌입니다. '꽃'이 소규모의 2집처럼 전통가요 노선이라면, '너'는 즐거움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했던 1집에 가깝습니다. 요즈음 1집 시절의 '소규모'가 그리워지는 참인데, '너'가 올해 말에 발매 예정인 3집의 수록곡이고 3집의 방향을 보여주는 곡이라면 기대해도 좋겠네요. 2집에서 시도했던 전통가요와 만남을 시도한 '소규모'는 '요조'가 합류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제목은 ‘12 Songs about You’이지만, CD플레이어에 넣으면 나타나는 트랙의 수는 13개입니다. 히든 트랙이 한 곡 있다는 얘기죠. 13의 부정적 느낌 때문에 ‘13 Songs about You’라고 조금 이상하게 들려 숨겨놓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정규 트랙에 참여한 밴드의 곡으로 역시 상당히 좋습니다.
컴필레이션이지만 Skip을 눌러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곡들이 많습니다. ‘Cracker’가 짤막한 ‘에피소드’같은 노래들을 담고 있다면, ‘12 Songs about You’는 ‘Cracker’의 수록곡들이 이후에 나온 파스텔뮤직 소속 여러 뮤지션들의 정규음반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 컴필레이션도 앞으로 발매될 음반들의 'Sampler' 역할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요조 with 소규모', '소규모', '한희정' 등 기대되는 파스텔뮤직 음반들에 대한 기다림을 이 앨범으로 달래봅니다. '무슨 Sampler를 돈 주고 사나?'라는 의견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수록곡 뿐만 아니라 디지팩과 북클릿의 디자인에도 세심함을 보여주는 이 앨범은 인디팝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분명히 소장가치가 있으리라 봅니다. 더구나 수록곡들의 강한 응집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그냥 듣게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별점은 4.5개 입니다.